얼마 전,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했다.
질문에 관련된 답변을 진행하던 중 작가는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 대한 예시로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 아이들을 볼 때, 그 자체로도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인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 흘려 넘긴 답변이었다. 다른 답변들과 달리 노트에 꼼꼼히 적지도 않았다. 지금 쓴 내용은 내 기억에 의존해 적은 내용이니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변명 한 문장을 괜스레 붙여본다.
그 후 며칠이 지나, 과외 교사인 나는 어김없이 과외 학생의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발견했다. 태어난 지 이주일도 지나지 않은 ‘갓 태어난’ 아기를! 과외 학생의 동생이 태어나 흰 포대기에 쌓여 거실에 누워 있었다.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내가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채 학생의 집에 방문한 터라 놀랐다. 너무 작고, 빨갰다. 봐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몇 초 바라보다 방 안으로 뒷걸음질쳐 들어갔다.
감히 내가 다가가면 안될 것 같은 광채의 아우라를 풍겼다. 그 작은 아이를 본 후에 북토크의 답변이 떠오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별 생각 없이 넘어간 답변을 이제야 이해했다.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완전하고 온전하구나.
며칠이 지났음에도 계속해서 갓난 아기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렇게 작고 어린아이를 처음 본 긍정적 충격이 내 머릿속을 휘감는다. 수많은 책 속 말들보다도 직관적으로 느낀 ‘소중함’이었다. 여리고 여린,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아이의 모습을 사람 모두가 거쳐 지금 이 순간에 이르렀다.
다음 주면 춘분이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로, 서양에서는 주로 춘분 이후를 봄으로 본다고 한다. 과거에는 농사 준비로 온 마을이 바빠질 시기이기도 하다. 완연한 봄이 찾아오기 전에 본 아기는 내게 봄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곧이어 새싹이 자라난다. 새싹은 꼭 아기를 닮았다. 땅속에서의 열띤 발버둥 끝에 지면을 뚫고 자라난다. 사실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은 봄이 찾아오는 게 두려웠던 나는 갓난 아기를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릴 때 내 사진을 펼쳐봤다. 똑같이 흰 포대기에 쌓여 있는 낯선 아기의 모습을 보고, 이만큼 자라났으니 앞으로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함을 품고 태어난 나를 믿고, 너를 믿고, 그 사람들이 똘똘 뭉친 세상을 믿고 묵묵히 자라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