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변화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비로소 인간으로 변태하는 순간의 조각들'이라 칭할 수 있다. '변태變態'는 번데기가 나비와 같은 성체로 변할 때 쓰는 말로, 인습적인 생각을 '번데기'에 비유했을 때 그것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인식의 흔적들을 '변태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자연'은 단순히 세상과 우주의 본연을 뜻하지 않는다. 사전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 세상과 그 진리에 대한 일련의 인간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자연을 어떻게, 어느 시선으로 바라보느냐'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바라볼 때 인간의 개념이 얼마나 관여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에 관한 관심과 고찰의 변화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시대별 인식 변화가 인간의 또 다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7세기, 종교라는 거대한 손에서 '변태'하다.
[“모든 학예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 학문에는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사용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혹은 전환이라는 말은, '탈현대 postmodernism'에서 사용되는 '벗어나다'라는 뜻인 ‘탈脫’의 개념과 비슷하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획기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구 운동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자연의 질서와 체계를 '수학'이라는 인간 이성으로 해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생각하는 방식'의 전환과 발명이라 일컫고 싶다.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 발췌한 위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과 점성학과 같은 학문이 수학의 모든 분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우주와 세상의 본연 상태가 어떠한 원리로 설명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 원리는 다름 아닌 '인간'이 고안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가 기독교 중심의 인습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체운동의 원인에 대한 가정을 가지고 기하학적 원리로부터 과거와 미래의 천체운동들을 관측된 것과 같게 계산될 수 있도록 가설이나 원인을 편의에 따라 고안해 내는 것이 천문학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자에 대한 정의가 흥미롭다. 위와 같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의 한 문장은, 마치 그 전의 천문학자, 즉 천동설을 확실한 근거 없이 주장했던 과거의 방식에 대한 고찰과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판적 지적 또한 공통된 부분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현대 과학으로 증명한 우주의 체계와 얼마나 비슷했는가?'가 주안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7세기의 핵심은 자연을 해석하는 방식에 '인간의 영역이 얼마나 관여했는가?'이며, 따라서 신이라는 번데기에서 인간이라는 나비의 형태로 변하는 17세기를 ‘변태’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Woman Lacing Her Bodice Beside a Cradle, 1660-1663
인간에 주목했던 17세기의 경향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일상 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회화의 소재로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이 등장하거나 각 장르가 종교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화, 전문화 되었으며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사실주의 미술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작가 피테르 데 호흐 Pieter de Hooch(1629-1684)의 작품
17세기에 우주와 자연의 체계를 인간 이성과 어떠한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보인 반면, 18세기에는 인간의 현재 삶을 인간과 사회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가령, 1755년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를 쓴 볼테르 Voltaire(1694-1778)에게 보낸 루소 Jean-Jacques Rousseaus(1712-1778)의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리스본에 20,000 채 가량의 6~7층짜리 집들을 지은 것은 자연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대도시의 주민들이 좀 더 균등하게 분산되어 있고 좀 더 가볍게 거주했다면 피해는 훨씬 적거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진의 피해 원인을 신으로 규정했던 볼테르와 다르게 루소는 그 원인을 '인간' 자체로 보았는데, 이는 자연의 영역을 오로지 '인간'과 '사회'의 맥락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볼테르의 시와 루소의 답변을 토대로 본 18세기의 특징은 '현생'이다. 인간의 형태로 변태한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현생이라는 먹이를 찾아 떠나는 시기라 정의할 수 있다.
Le Verrou, 1777-1778
이러한 18세기의 특징은, 18세기 초의 로코코 미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크 회화가 종교적이고 숭고한, 그리고 궁전을 중심으로 한 왕실 회화인 반면, 로코코는 탈종교적인 양상을 중심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적 생활상을 보여준다.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1732~1806)의 작품을 보면, 마치 다른 존재들의 침입을 막듯이 자물쇠를 잠그고, 사랑이 깃든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듯하다. 사랑과 감정으로 엿볼 수 있는 인간의 생활은, 루소가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의 원인을 다름 아닌 '인간'으로 보았던 것과 같이 현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증폭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worth(1770-1850)의 시를 읽으면 인간의 시선이 더 이상 외부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이 육신의 숨결과 우리 인간의 피의 순환까지와 멎고, 우리가 육체 속에 잠들어 살아 있는 영혼이 된다. 또 한편 조화의 힘과 기쁨의 깊이 있는 힘으로 고요해진 눈을 가지고 우리는 사물들의 생명을 꿰뚫어 본다 … 이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서 잊혀진 쾌락의 기쁨을 느꼈다. 이러한 기쁨은 … 기억되지 않는 사랑과 친절의 행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준다."]
자연은 우리의 감정을 뒤흔든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 행위에 영향을 준다. 자연 본연의 상태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았던 이전의 학자들과는 다르게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감정을 한껏 드러낸다.
또한 워즈워스의 시에서 발췌한 위의 문장을 읽으면, 단순히 감정이나 사랑 등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원의 세월 속에서 눈을 감은 후, 즉 '죽음'에도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육신 안에 존재하는 영혼과 죽음 등 워즈워스는 이전과 달리 '인간 내면'에 시선을 돌렸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다.
이처럼 워즈워스의 시를 토대로 본 19세기는, 인간으로 변태하여 현생이라는 먹이를 찾아 떠났던 나비가 자신에 대하여 침잠하는 시기라 정의할 수 있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죽음과 감정 등 인간의 내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19세기의 특징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ndrich(1774~1840)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위의 작품은 작품 중심에 위치한 인간이 관람객을 등지고 자연의 경관 앞에 서 있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고 있다. 감상자로부터 자연을 인간보다 더 멀게 표현함으로써 감상자가 하여금 인간에 주목하게끔 한다.
A walk at Dusk (1830-1835)
이 작품의 경우 죽음에 묵도하는 듯한 인간을 그렸다. 육신 너머의 세계,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묵도하는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안개 등의 자연의 모습은 워즈워스가 인간 내면으로 점점 시선을 돌렸던 것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디로 향해서 가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요새와 같았던 신의 시간이 저물었을 때,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움의 정답을 ‘인간’으로부터 찾았다. 이 시기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마치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1877-1962)의 저서, 《데미안》에 나오는 '알'과 같다.
'자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변하는 양상은 마치 세계라는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았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릴 때마다 또 다른 세계를 맞이했겠지만, 인간은 점점 인간 그 자체, 그리고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비로소 '인간' 혹은 '나'라는 세계로 향해 힘차게 날갯짓하며 나아갔다.
나비가 변태하는 습성을 가진 것과 같이 그리고 새가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이 17세기에서 19세기의 변화는, 변태하는 순간의 조각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