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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낯선 공간을 방문하더라도 몇 번만 가보면 이내 그 공간과 거리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매일 가는 학교나 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가더라도 늘 정확한 목적지를 찾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온전히 우리의 공간이 아닌 곳도 조금만 발붙이면 친숙해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우리가 사는 집이라는 공간은 어떨까. 매일 문밖을 나서는 현관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나만의 방, 그리고 다 함께 이야기하는 거실까지. 늘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집 자체는 우리 삶의 필수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태초의 인간은 집이 없어 이동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자연스레 추위와 위험 앞에서 늘 안전할 수 없었고 결국 움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집 하나 생겼을 뿐인데 돌아갈 곳이 생기고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생을 배경으로 한 영화 <히어> 역시 다양한 집이 있기 전부터의 공간을 조명한다. 넓은 허허벌판에서 인류는 목재를 사용해 집을 지었고,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그 땅과 자리를 지켜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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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영화가 중점을 두는 것은 한 가정의 거실이다. 다양한 장면이 나오는 것이 보편적인 여느 영화와는 달리, <히어>는 오로지 거실만을 고정된 장소로 설정했다. 처음 집을 보러 온 어느 부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행복하게 계약을 하는 것에서부터 생명의 탄생 및 다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었던 집 안은 여러 가구와 생필품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여러 굵직한 기념일도 서로의 생일도, 일상의 갈등과 슬픔 모두 한 가정의 거실에서 펼쳐지며 이들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해간다.


분명 임신 사실을 알리며 환호했던, 그래서 인생의 행복한 나날만 펼쳐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젊은 부부는 자녀를 양육하며 인생의 크고 작은 위기에 맞닥뜨린다. 그 위기에는 경제 상황으로 인한 남편의 실직과 부모 부양 문제, 저마다의 희생으로 인한 시시비비가 있다. 가정을 이루어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낸다는 것은 언제나 굳건한 책임이 따르는 것임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꿈을 하나씩 포기하며 현재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문명의 발달과 동시에 먼 과거의 인류가 그토록 바랐던 집이라는 정착 공간은 이제 더이상 생존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 구성원의 심리적∙정서적 안정감과 경제적 지원, 삶의 사소한 행복까지 모두 지켜내기 위한 곳이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눈물 흘리는 모습의 끝은 다시 잘살아 보기 위해 항상 봉합해야 하는 과정이었고, 그 시간만큼 세월은 흐르고 흘러 모두 서서히 나이 들어간다. 후회와 슬픔과 그리움은 늘 함께했고 그럼에도 또 극복해낼 무언가가 있는 곳이 그들 구성원이 집에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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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는 같은 공간에서 자칫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를 잔잔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관조했기에 참신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가정의 일상은 평범한 우리네 삶과 다를 게 없다. 밖에서는 남들의 시선에 눈치가 보여 함부로 하지 못하는 행동과 내밀한 가정사, 평범해 보여도 늘 고민과 염려가 있었던 세상 모든 가정의 공감을 자아내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가정에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으며 관객이 오롯이 등장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게 한다. 영원할 줄 알았던 가족의 결속은 각자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며 뿔뿔이 흩어지는 것에서, 우리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었던 집이라는 건축물도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할 수는 없음을 관객은 자각한다.

 

***

 

인생의 대부분을 지금 사는 이 공간에서 보냈지만, 문득 예전 살던 동네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리움에 파묻혀 가본 그곳은 더는 유년 시절을 상기시킬 만큼의 공간이 아니다. 그때 살았던 집은 새롭게 단장하여 예전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고, 자주 가곤 했던 백화점은 철거한 지 오래여서 공사 중이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골목골목 자주 갔던 문방구와 맛집은 낯선 상점과 건물로 탈바꿈했으며,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어렴풋이 기억나는 집에서 학교 가는 길, 골목으로 통하는 샛길뿐이다.


비단 몸에서 멀어진 동네뿐인가. 현재 사는 곳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 가는 길은 익숙해도 그곳에 들어선 건물과 상점은 낯설 때가 많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공간의 간판이 떨어지고 새로운 간판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흔하다. 자주 갔던 곳도, 새롭게 알게 된 곳도 정을 주고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임대 표시와 먼지 가득한 허전한 내부만 보일 뿐이다. 분명 여기서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 이젠 예전에 이곳에 뭐가 있었는지도 기억에서 옅어지면서, 여기는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소개할 수 있는 터전이 맞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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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아무 노력 없이 먹기에, <히어> 속 젊은 부부는 어느덧 지팡이를 짚는 노부부가 되었다. 희로애락으로 가득 찬 그들의 공간은 이제 처음 집을 둘러볼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깨끗하고 허전하며 의자 두 개만 달랑 놓여 있다. 썰렁한 공기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노부부는 눈물을 흘린다. “우린 바로 여기 있었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하고 쇠약해져도 또렷하게 함께 살았던 그때 그 시절과 모습을 떠올리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인생의 감동을 맛본다. 지금도 카메라를 돌려 비추는 여러 집에는 각자의 특징대로 저마다의 삶을 흩날리는 수많은 ‘여기’가 있음을 알기에.


하나의 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대서사시는 사실 우리의 삶이었음을, 영화의 막이 내리고 결국 우리가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시작할 곳은 우리 각자의 집이었음을 인지하며 관객은 돌아가야 할 곳을 확실히 파악한다. 힘든 일상을 보내고 돌아갈 집은 거창하고 대단한 대저택의 화려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삶을 보내며 갈등하지만, 늘 함께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태초의 인류가 그토록 갈망했던 집이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르며 지나온 곳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을지라도 그렇게 이어진 삶과 사람들에게 작지만 선명한 나의 진심을 전한다.


"여기(Here)에 있었던 시간을 나와 함께 해주어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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