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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두 종류로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인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두 번이나 보기에는 내 마음이 힘겨운 영화이다. 전자를 보면 영화가 무너져 있고, 후자를 보면 내가 무너져 있다. 그럼에도 끝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하는 영화는 단연 두 번째 종류의 영화다.


정지혜 감독의 영화, <정순>(2024)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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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김금순)은 동네 식품공장에서 일한다. 딸의 차를 타고 출근해서 간단한 간식을 먹고,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단순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결혼을 앞둔 딸이 독립한 뒤 혼자 사는 정순에게 식품공장은 또 다른 삶의 터전이다. 지위를 이용해 직원들을 무시하고 깐깐하게 통제하는 젊은 관리자 도윤(김최용준) 같은 인물의 존재를 제외한다면 정순의 생활은 제법 평화롭게 보인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정순의 평범한 일상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타지에서 왔다는 영수(조현우)가 공장에 새로 입사한 것. 도윤이 신입 직원에게 자상하게 일을 가르치며 유혹하듯, 정순도 영수에게 업무의 노하우를 가르쳐주며 미소를 짓는다. 물론 자연스러운 선의에서 시작된 접촉이었으나, 매일 마주치는 삶의 터전에서 일을 매개로 생겨난 감정은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직원들끼리 떠났던 야유회를 마치고 동침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 밤을 함께 보내는 연인 사이가 된다.


일상에 생겨난 작은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균열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변화를 인지한 타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 때다. 정순은 딸 유진(윤금선아)과 사위 성호(고은렬)에게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응원 받지만, (“애인 있으시면 저희한테 편하게 알려주세요.”) 영수는 도윤을 비롯한 타인들에게 사랑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 당한다. (“그럴 시간이나 돈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죠?”) 자신의 삶에 어우러지는 지지와 자신의 삶을 파고드는 무시. 같은 관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정순과 영수의 연애 방식은 갈라진다.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영수는 자신의 열등감을 정순에게 쏟아낸다. 정순은 그런 영수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카메라 앞에 선다. 정순이 영수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그를 향한 순수한 애정과 응원일 텐데, 영수는 오직 본인의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것을 악용한다. 이 영화가 두 번 보기에 힘겨워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무시하던 이들에게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영수는 자신을 위해 옷을 벗은 채로 춤추는 정순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유포한다. 정순의 영상은 그녀의 삶의 터전을 중심으로 수습할 새도 없이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정순은 무기력하게 무너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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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피해자가 된 정순을 구하기 위해 우선 나서는 것은 그녀의 딸 유진이다. 유진은 무너진 정순 곁을 지키며 단호한 태도로 범죄와 맞선다. 범죄의 증거와 가해자의 존재가 명백한 상황. 그러나 영화 <정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는 평범한 과정에 대한 경계와, 그러한 범죄행위가 응당 받아야 할 철저한 징벌의 요구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권선징악의 통쾌한 결말 대신 조금 더 복잡한 다른 길을 선택한다.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고자 하는 유진을 막아서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인 정순이다. 정순이 사건을 기소 유예로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순간 영화는 또 다른 하나의 방향을 향해 새롭게 열린다. <정순>은 약자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


정순이 가해자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하는 유진 앞에서 정순은 최초로 고함치며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은 내 삶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선택도 책임도 나의 몫인데 “왜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하냐고. 정순은 피해자인 동시에 약자다. 먹고사는 일에 치여 평생 가사노동과 단순노동의 틀에 얽매여야 했던 경제적 약자이자, ‘엄마’나 ‘이모’라는 호칭 아래 억척스럽게 강한 척했으나 실은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졌던 오래된 여성성을 답습하며 살아온 사회적 약자다. 그러니까 정순은 사실 이전부터 이미 끔찍했던 약자로서의 삶의 울타리를, 가해자를 스스로 용서하는 방식을 통해 벗어나고자 했던 것. 이것은 범죄의 가해자에 대한 거룩한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남은 생을 위한 절실한 용기다. 두 번 다시 겪기 힘든 일을 통해 두 번째의 삶을 마주본 정순은, 지난 삶의 피해자였던 자기 자신을 용감하게 용서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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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로 머물던 삶의 터전이자 이제는 끔찍한 범죄의 피해 현장으로 변한 공장에 돌아가서 정순은 다시 춤을 춘다. 타인의 요구에 순종하며 내보이는 춤이 아니라, 나의 삶은 나의 것이라고 타인에게 각인하는 춤이다. 이제 정순은 스스로 운전해서 출근할 수 있는 정순이며, 자신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정순이고, “시킬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선의로 포장된 타인의 모든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정순이다. 정순은 그런 정순으로 살아간다. 억울한 피해자일 뿐 결코 무력한 바보로 남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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