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이름 올린 <구미식>은 구미시를 배경으로 행복한 동상과 조우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블랙코디미를 표방한 만큼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신랄하게 현대의 정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현란하게 무너뜨리며 관객을 혼란하게 한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도전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지금 이 시국에 꼭 필요한, 무엇보다 용감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관람하였다.
연극의 배경은 '가상의 도시' ―라고 수상할 정도로 강조되는― 구미시.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을 <유리동물원>의 작가 약물중독자이자 클로짓 게이인 '톰'은 새마을운동기념공원을 방황하다 과거 독재자의 형상을 띈 행복한 왕자 동상과 마주한다. 동상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명백히 10.26 사태와 함께 박정희를 떠올리게 한다. 이 동상은 톰에게 자신의 보석을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씩 떼어줄 것을 명한다. 그를 대가로 톰은 마약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톰은 과거의 기억들을 유영하며, 점차 괴로움에 빠져든다. 명징한 스토리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이것뿐이다.
명백히 존재하는 지역임에도 구미시가 '가상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있다. 이곳은 실제 구미시의 구체적인 장소성을 반영하기 보다는, 급속한 산업화의 모순과 부작용을 고루 끌어안은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 도시를 유토피아로 만들고자 했다는 동상의 허울좋은 말들과는 다르게, 도시는 빈민으로 들끓는다. 공원 어귀에서 마약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갈 곳을 잃고 부랑하는 이들이 매일 차가운 시체로 발견될 정도로. 동상은 그중 극히 일부에게 보석을 떼어 건네주는, 아주 일시적이고 범용성이 낮은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베풂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착실히 내면화한 자들, 결과적으로 자신의 맹목적인 백성이 되어줄 자들에 대한 일종의 조건부 보상이라 봐야 한다.
죽어서까지 동상이 되어 이 땅을 굽어 살피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아낌없이 몸의 일부를 떼어 몇몇의 빈민을 구원했다는 소식은 하나의 신화가 된다. 이러한 신화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한 자들의 입을 타고, 또 핏줄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구전된다. 그러나 주인공 '톰'은 이러한 구미시에 초대받지 못한 인물이다. 퀴어이자 약물중독자인 그는 구미시의 건실한 시민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 이 신화의 탄생에 한 몫을 할 수 있다. 가련하고 선량한 제비의 탈을 쓰며, 동상의 선행을 돕는 것이다. 톰이 받는 마약, 일부 빈민들이 받는 보석, 동상이 받는 맹목적인 우상숭배는 모두 철저한 보상 체계에 따라 돌아간다. 동상 덕분에 마약을 얻은 톰은 신화를 실어 나르는, 날개 묶인 제비가 된다.
<구미식>이 표방하는 이러한 혼란은 주인공 '톰'의 내면세계와 맞닿아 있다. 약물의 영향 때문인지 톰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질서없이 유영한다. 그러다 근대산업화 시기의 폭력적인 가치를 그대로 내면화한 교육자를 만나기도, 미성년의 나이에 약물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은 아이를 만나기도 한다. 전자는 오래 교장의 자리에 서서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아이들의 가치관을 멋대로 성형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그러나 후자는 어떠한 가치관이든 내면화하기도 전에, 보호의 울타리에서 추방되어 짧은 삶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톰이 마주하는 이 두 인물만 비교해보더라도, 구미시가 포용하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시민 사이의 차이를 감각할 수 있다.
연극 <구미식>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진행 방식을 취한다. 말하자면, 플롯을 해체하고 맥락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독자적인 스토리텔링을 이어나간다. 희곡 <유리동물원>과 동화 <행복한 왕자>의 텍스트를 일부 차용해 재해석하는 와중에, 지나치게 현대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함의들을 서사 곳곳에 배치해 아이러니함을 자극한다. 이는 관객을 서사에 포섭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튕겨내는 방식이다. 서사는 이어질 듯 하다 끊기고, 그 사이에 광고 팝업창이나 제4의벽을 허무는 배우들의 파편적인 발화 등이 끼어들어 질서를 흐린다. 메인 서사를 따라가고자 노력했던 관객들은 백기를 들고 만다. 그러다가도 이 무맥락이 의도된 것임을 깨닫는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연극이 끝난 뒤 관객석을 나갈 때, 저렴한 배너 광고로 도배된 화면만이 뜬 빈 무대를 바라볼 때, 이 고도로 연출된 산발성이 곧 현대 사회에 대응하는 우리의 파편적인 인식 체계 그 자체였음을 감각하게 된다.
의도적인 무맥락과 불친절함에 불쾌함을 느끼는 관객에게, 그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해석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구미식>은 막이 내릴 때가 되어서야 이것이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죽는 날까지 박정희를 숭배했지만, 사후에는 그 존재조차 증명받지 못한 채 손자의 기억 속에서만 스러져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불친절함은 할머니를 이해해보려는 불가해하고 애처로운 시도가 끝내 맞이한 체념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일말의 진심이 가슴에 스며드는 순간, <구미식>을 지켜보며 느꼈던 모든 혼란이 그대로 두어도 좋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익숙한 것으로 치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