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조 생활
룸메이트가 생겼다.
기숙사에 살던 학생 시절을 제외하곤 1인 가구로 여섯 해를 쭉 지내 온 내가 난생처음 2인 가구가 되었다.
2인 가구로 산다는 건 혼자 생활할 때보다 더 강한 책임감과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는 착실히 가꾸어 온 혼자만의 세계와 질서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일이며,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지닌 상대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차근차근 조율해나가는 일이다.
무엇보다 살림을 합치지 않고선 도무지 알 수 없던 상대의 습관-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샤워 후 곧바로 빼지 않는다거나, 다 쓴 휴지심을 새것으로 교체해 놓지 않는다거나, 허물을 벗듯이 외출복을 바닥에 고이 벗어 놓는 일-을 수시로 목격하는 일이다.
서로가 그다지 빈틈없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거기서부터 2인조 생활이 시작된다.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법을 배우며 매일 느리게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즘, 컨셉진 120호의 질문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나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이미지가 돋보이는 표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함께"라는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나타낸 표지라서 좋았다. 책장을 넘기면 "함께"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구성된 다채로운 이야기가 하나씩 펼쳐진다.
먼저 ITEM 코너에서 "함께 있을 때 더 빛나는 일곱 가지 아이템" 소개를 시작으로, PLACE 코너에서 엄마와 함께 걷던 산책길, 방문한 음식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조금 더 긴 호흡의 인터뷰 글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TO LIFE 코너에 실린 "커다란 하트 모양으로 말하는 사람들"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 FDSC>에서 알게 된 세 명의 디자이너가 결성한 밴드 666에 대한 이야기로, 첫 합주 이후 6개월 만에 부산에서 데뷔 공연을 했다는 이들의 공연명은 <우리가 실력이 없지 친구가 없냐>.
호쾌한 공연명에 웃음이 절로 났다. '그래, 관객은 없고 실력만 있는 공연보다 실력은 없더라도 관객이 넘치는 공연이 낫지. 공연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건 공연을 즐기는 관객들의 몫이니까!'
지연 : "첫 공연 때, 누구는 디제잉을 해준다 그러고요. 누구난 사진을 찍어주겠다, 누구는 매니저 역할을 해주겠다 했어요. 주변 친구들이 각자 자기가 가진 능력치를 나눠주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돈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이런 식으로도 일이 완성될 수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저희도 최대한 뭔가를 함께 나눠주고 싶고요." (p. 79)
밴드 666의 이야기를 읽으며 함께하는 마음의 모양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기꺼이 함께해 주었던 이들의 마음에 대해, 나 또한 누군가 원하는 일을 함께해 주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
망설임 없이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마음. 그건 정말 사랑하는 마음과 다름없지 않을까. 함께 나눌수록 소모되는 마음이 아닌 자꾸만 부풀고 부풀어서 마침내 커다란 하트 모양이 되는 마음.
HOME 코너에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46년 된 집을 리모델링해서 혼자 살고 있는 이성선 님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가 사는 집의 특별한 점은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들을 모아 둔 수장고가 있다는 점이다.
각 오브제 앞에 캡션을 제작해 물건에 담긴 스토리와 역사를 떠올릴 수 있도록 진열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들의 추억에 대한 짙은 애정과 존중이 묻어나는 인터뷰 내용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나다운 공간"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생겨났다.
성선 :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오면 둘러보면서 이게 뭐냐고 물어보거든요. 오브제를 하나씩 소개할 때마다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이 물건들 덕분에 집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않다고 느낄 때도 많고요." (p. 167)
CLOSEUP 코너에선 함께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함께 나누고 어울리는 정신이 담긴 김장문화, 온 가족의 아이스크림 투게더, 함께 공부하는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스터디 윗 미 콘텐츠 등 "함께"라는 키워드와 연관된 문화, 광고, 콘텐츠, 사회 현상 등 다양한 발견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더 잘 함께하기 위하여
이번 호를 읽으며 앞으로 더 잘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2인조 생활을 지속적으로 잘 꾸려 나가고 싶다. 타인과 함께하는 삶은 간편한 혼자의 삶보다 불편하지만 나는 이 삶의 형태가 마음에 든다. 혼자 사는 삶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면, 함께하는 삶은 나를 넓어지게 만들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좋은 삶이란 불편하지 않은 삶이 아닌, 불편을 감수할 만큼의 기쁨과 의미가 존재하는 삶이다.
함께 생활하며 느끼는 일상 속의 기쁨과 든든함. 가령 두 사람이라는 이유로 저녁 밥상에 반찬 하나가 더 추가되는 일, 한 사람이 설거지를 할 때 다른 한 사람이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는 일, 밤늦게 아플 때 약을 사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늘 곁에 있는 일.
서로 돌보고 돌봄받는 2인조 생활의 기적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감사하며 2인조 생활을 지탱하고 싶다.
앞으로도 누군가와 부지런히 함께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