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즐겨보던 철학 유튜버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 하여, 보기를 미루고 있던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았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 이후 처음으로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이었기에 이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의 흔적을 반드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화를 곱씹을수록 짙게 나는 불교의 향내에 취하여 얕은 지식이지만 둘의 관계에 관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가늠할 수 없는 사실 여부 속 명징한 철학, 버닝 Burning
이창동 감독의 2018년 작품, 영화 <버닝>은 명징한 철학을 머금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여러 관람객이 고개를 휘저으며 당최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몇몇 반응들도 있기에 ‘명징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는 종수와 해미의 이야기에서 그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둘은 사랑을 말하는 듯하다가도, 확언할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한다. ‘전락한다’ 라고 표현한 이유는, 서로 간의 사랑을 확신했던 종수가 느꼈던 감정 때문이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의 등장으로 모호하게 바뀌어 버린 둘의 관계에서 종수는 굉장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의 향은 관객의 코에 진동할 정도로 매우 강력하다. 이 향은 종수가 사라진 해미의 행방을 찾고 벤을 칼로 찌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그리고 관객은 향의 여운이 남아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후유증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이 사실이고 소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그 향을 좇아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
"귤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버닝>은 불안함을 머금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현실 문제, 가족과 사랑, 재미 등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욕망과 갈증을 느낀 세 사람의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가위로 이내 자르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복잡한 관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종수, 해미, 벤은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좇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서로 다른 것을 갈망한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종수는 그런 해미를, 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재미를 찾는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거를 알려고 하는 사람.'
영화에 나온 표현으로 그들을 분류하면 해미와 종수는 '그레이트 헝거', 벤은 '리틀 헝거'일 것이다. 이는 해석하는 이마다 다를 것이라 예상하는데, '삶의 근본적 의미를 갈구하는가?'를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앞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만족할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욕망을 좇는 그레이트 헝거와 리틀 헝거의 이야기, <버닝>은 단순히 이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나 미스테리가 아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이고 궁극적인 메시지가 분명하다. 물론 사라져버린 해미의 행방불명으로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사랑에 관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단순히 해미, 종수, 벤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이 영화를 관람하고 해석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버닝>을 관철하는 어느 한 장면을 통해 이 영화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단연 '해미의 팬터마임'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미가 배우고 있다던 팬터마임, 해미를 따라하며 내 손안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며 집어보자. 아마 대개 귤이 있다고 생각하며 손을 동그랗게 말 것이다. 그러나 해미는 그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보라고 한다. 사실 어쩌면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없는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없는 귤을 잊는 것은 한 끗 차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그 차이의 힌트는 <버닝>의 원작 소설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선禪 같네” 영화 <버닝>에서는 이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서 종수가 ‘선禪’ 같다고 말한 부분은 굉장히 중요하다.
불교, 깨달음, 그리고 공空
선 禪은 인도의 불교 명상 수행법 중 하나인 디아나 Dhyāna에서 출발한 불교의 한 종파이며, 불교는 ‘깨달음’에 관한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이어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 다름 아닌 ‘공空’이다.
텅 비어 있다는 뜻을 가진 ‘공空’을 허무주의로 오해하는 의견도 다분히 있다. 그러나 공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그릇에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나 자신은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미는 귤이 없다는 것을 잊고 가능성을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해미의 집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고양이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채워넣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노을'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한다.
해미는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팬톤마임을 한 것처럼 자신을 의미로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나 '공'은 변치 않는 본질이기에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났던 기대감과 달리 무력감을 느꼈으리라.
아마, 이처럼 우리 또한 ‘나’라는 텅 빈 그릇에 의미와 가능성을 완전히 채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삶을 계속하여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영화 <버닝>의 '공' 사상은 20여년 전 작품 <매트릭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그'인지 알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주인공 네오는 어떤 힘을 사용하지 않고 숟가락을 손쉽게 구부리는 소년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아요.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요'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숟가락은 텅 비어 있다. 이 진실을 깨달으면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고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체를 이루는 원자는 작은 빛에도 영향을 받으며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변화를 통하여 우리는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은 '텅 빈' 존재라는 것을 양자역학의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의미상으로도 모든 물체는 변화한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영원한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변화를 편히 맞이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