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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영화 Mickey 17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조심하는 것 2가지가 있다. 휘파람을 부는 것과 손발톱을 깎는 것.
어릴 적 무심코 들었던 이 두 가지 속설은 여전히 내 삶에 사소하지만, 은근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야트막한 뒷산이 둘러싼 동네에서 자랐기에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꽤 실감 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그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은 ‘손톱 먹은 들쥐’ 이야기였다. 밤에 깎아둔 손톱을 쥐가 몰래 먹고, 이윽고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둔갑해 나타난다는 속설은 어린 마음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공포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두 명의 내가 존재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Mickey 17의 줄거리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도 바로 이 들쥐 이야기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Mickey는 (들쥐가 한 사람의 손발톱을 먹고 짠-하고 나타나듯) 마치 소모품처럼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Expendable’이다. 친구 Timo와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버리자, Mickey는 지구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사채업자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변변치 않은 직업이 없던 Mickey는 정치인 마셜을 필두로 구성된 미지의 얼음 행성 니플하임으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Expendable’이란 직업에 지원한다.
다시 말해, 미지의 행성 개척을 위한 실험에 사용되는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Expendable이 된 영화 속 Mickey를 보면 여러 잔인한 생체 실험에 사용되는 들쥐 같다. 그는 나름의 인간다운 직업을 가진 다른 우주선 탑승객들에게 무시를 당하기 일쑤이다. 심지어 그들은 실험 쥐 처지의 Mickey를 향해 호기심과 비아냥을 담아 Mickey에게 묻는다.
죽는 느낌이 어때?
상식적 수준에서 벗어난 이 직업에 대해 (내가 들쥐 이야기를 두려워했듯)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선뜻 지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니플하임으로 가는) 출국 심사관 또한 Mickey를 말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Mickey는 의연해 보이기까지 하며 (어쩌면) 예고된 죽음에 대해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Mickey 17은 근미래라는 배경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감각을 뒤흔든다. 생명과 죽음, 자아와 타자의 경계에 대한 고민은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Mickey의 존재가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오래전 들쥐 이야기가 불러일으켰던 불안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17 & 18
Mickey 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Mickey 7을 원작으로 한다. 일부 대중들은 봉준호 감독이 미키를 무려 10번이나 더 죽인 잔인한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 말에 함께 웃으며 영화의 극적인 플롯을 위해 단순히 죽음의 횟수를 늘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 관람 후,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짧게 언급한 17과 18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듣고는 그 우스갯소리 너머에 숨겨진 상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주에서 만 18세를 기준으로 성인과 미성년자를 구분한다. 즉, 17과 18은 성인이 되기 직전과 성인이 된 이후의 경계를 상징하는 숫자다. 영화 속 Mickey는 동일한 외형과 기억을 가진 복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Mickey 17과 Mickey 18은 마치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단순히 복제 과정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만들어낸 차이처럼 느껴진다.
Mickey 17은 자신의 처지를 일종의 벌이라고 여기며, 순응적인 태도로 소모되는 존재다. 과거의 실수에 사로잡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은 유약한 어린아이와 같다. 반면 Mickey 18은 같은 기억을 가진 복제 인간임에도 더 뚜렷한 주관과 반항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어쩌면 Mickey 18은 Mickey 17이 스스로 되기를 두려워했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두 존재의 가장 큰 차이는 삶에 대한 애착의 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Mickey 17은 스스로를 소모품이라 여기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Mickey 18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삶을 소중히 여기게 만들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를 불러온다.
결국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영화는 Mickey의 숫자를 통해 한 존재가 자아를 인식하고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Mickey 17이 단순히 죽음을 반복하는 존재였다면, Mickey 18은 처음으로 ‘삶’을 인식하고 어렴풋한 주체성을 보여준다. 숫자 하나 차이가 만들어낸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변화는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테세우스의 배
영화를 보기 전 유튜브 빠너더스 채널에 올라온 문쌤 시리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상에서는 영화와 함께 고민해 볼 철학적 역설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를 소개했다. 아테네인들은 아폴론을 기리기 위해 이 배를 타고 테세우스의 전설을 기념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배의 부품들이 하나둘 교체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만약 배의 모든 부품이 교체되었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난제는 Mickey 17의 서사와 놀라울 정도로 맞닿아 있다. 이론적으로 미키의 복제는 외형과 기억을 완벽히 동일하게 유지한다. 그렇기에 Mickey 17과 Mickey 18은 같은 존재여야만 하며, 함께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한눈에 둘이 전혀 다른 존재임을 감지하게 된다. 목소리 톤, 눈빛, 손짓과 같은 작은 차이들이 미키의 자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미묘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복제 오류가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껍데기만이 아니라 기억과 경험, 관계, 그리고 시간이 축적된 자아일 것이다. 비록 같은 기억을 공유하더라도 경험하는 순간마다 축적되는 미세한 감각과 감정은 복제될 수 없다.
그렇기에 Mickey 17과 18이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Mickey 18은 Mickey 17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존재의 순간부터 다른 자아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마치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가 여전히 같은 배처럼 보일지언정, 처음 출항했던 배와는 전혀 다른 배가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Mickey는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나지만, 이전의 Mickey들은 단순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모든 Mickey는 한 번도 같은 존재였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Mickey 17 이전에 존재했을 수많은 Mickey들도 각각의 성격과 정체성을 가졌을 테고, 죽음과 함께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Mickey 17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자신의 죽음과 소모의 운명은 되돌아볼수록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자신이 하나의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음 Mickey에 삶의 기회를 넘겨줬을 수많은 Mickey의 명복을 빈다. 결국 이 영화는 테세우스의 배가 남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을 제시한다. 인간은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Mickey가 빨간 버튼을 터트리게 되며 그는 더 이상 복제되지 않는다. Mickey 19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영원히 Mickey Barnes로 존재할 뿐이다.
무한한 복제인간이 아닌 오롯한 Mickey Barnes라는 하나뿐인 존재가 가슴 속에 영원히 박히는 듯하다. 하나, 그리고 오롯한 존재가 되는 일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영원히 가져야 할 의무가 아닐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