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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중고 옷은 왠지 사기가 꺼려진다. 빈티지 옷 가게에 들어가면 퍼져 있는 특유의 퀘퀘한 냄새와 옷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텁텁함. 환경을 생각하고 패스트 패션을 거부한다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해 보려곤 하지만 영 쉽지 않다. 마음먹는다고 바로 행하기엔 아직 거리감이 느껴진다. 패션 좀 안다는 사람들은 빈티지를 찬양하곤 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 갈 길이 먼지, 모순되게도 빈티지해 보이는 새 옷을 입는다. 워싱이 들어간 새 옷을 사거나 새로 사서 오래 입고 다니는 것이 내가 즐기는 (누군가에겐 가짜로 보일) 빈티지다.

 

시린 바람이 쌩쌩 부는 여느 날과 다름없던 날. 늘 걷던 거리에서 고개를 꽉 파묻곤 목적지를 향해 널린 가게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직감이었다. 무인 옷 가게를 스윽 스쳐 지나가는데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들고 마네킹 앞에 멈춰 섰다.

 

마네킹은 내 취향의 옷을 입고 있었다.

 

패턴이 들어가 있는 남색의 니트 조끼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요즘 유행한다는 스웨덴 할머니 룩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뜨개질로 하나하나 짠 것 같은 투박함이 더해진 게 매력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웨스턴 스타일을 대표하는 패턴인 나바호 패턴이 들어가 있단 것이다! 그뿐이랴. 갈색의 빈티지한 단추 4개에, 남색, 빨간색, 흰색의 조합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아, 정말 내가 가진 흰색 웨스턴 셔츠 위에 입으면 포인트가 되고 예쁠 텐데… 그러니까 난 우연히 만난 옷에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무인 옷 가게에 걸려있던 이 옷은, 몇 번 시도해 봤지만 항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던 빈티지 의류였다. 학원에 가야 하는데… 너무 추운데… 마냥 마네킹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가게를 뒤로하고 발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을 걷다가 다시 뒤돌아서 마네킹 앞에 섰다. 아니다. 학원에 가야지.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뒤돌아서 가게 앞으로 돌아갔다. 왔다 갔다를 5번이나 반복했다. 널 정말 사랑하는데 너는 왜 빈티지니. 하는 아쉬움 섞인 한탄과 함께.

 

어찌 됐든 시간 안에 가야 할 곳이 있는 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몸은 앞을 향하지만 고개와 시선은 그 가게를 바라본 채로 꾸역꾸역 뒤로 걸었다. 정말 뒤로 걸었다.

 

희한했던 경험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고, 운명이라 느껴졌다. 저건 진짜 내 옷인데 라는 확고한 생각이 들었다. 옷도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나면 머리에 종이 울린다는데, 내 머리에 종을 울린 것은 웨스턴 패턴의 남색 니트 조끼였다.

 

겨우 간 학원에선 의류학과를 졸업한 언니에게 찍어둔 옷 사진을 보여주며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아쉬워하는 내 모습 때문인지, 언니는 흔쾌히 그 가게로 함께 향해주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인데 벗겨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하나밖에 없는 옷이잖아요!

 

빈티지 옷은 처음 사는데, 누가 입은 옷인지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귀여운 옷이니까, 귀여운 사람이 입었겠죠!

 

귀여운 옷이니까 귀여운 사람이 입었을 것이다. 라는 그 말에 빈티지 옷에 있었던 나의 선입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옷을 벗기려 마네킹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뒤에는 노란색이었다는 점에서 나를 더 펄쩍 뛰게 했다. 세상에, 앞에는 남색 뒤에는 노란색이라니! 바코드를 찍었을 때는 3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렇게 매력적인데 어떻게 3만 원도 안 할 수가 있어?

 

행여나 오래된 옷이라 어디에 걸려 찢어지기라도 할까 한 시간 동안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 옷과 함께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날 이후에 빈티지 옷을 또 구매하진 않았지만 이젠 그 옷 가게의 마네킹이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눈길을 주고 간다. 오늘도 그때처럼 예쁜 옷이 걸려있을까, 제발 또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빈티지 옷의 매력이란 무엇인가, 옷을 샀더니 덤으로 빈티지를 사는 마음까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유니크함에 있다. 내가 산 조끼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자주 구매하는 대형 쇼핑몰 앱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시간의 흐름이 옷에 담겨있기에 새 옷에는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제는 생산하지 않는 제품 라인이거나, 오래 신어야만 잡히는 주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오래된 가죽 자켓들은 실제로 백만 원 넘게 거래되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멋스러워지는 크랙들, 시간을 돈 주고 사는 셈이다.

 

빈티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오래되고 다 닳아서 외면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자신만의 분위기를 풍기며 더더욱 멋스러워진다고. 그렇기에 내 마음에 든다면 완전히 똑같은 제품으로 또 찾기 힘든 물건일 테니 구매를 고민해 봐도 좋다.

 

또 개인적으로는 막 입을 수 있어서 좋다. 흰 운동화를 사면 비 오는 날 사기가 꺼려지듯 새로 산 옷들도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의 손길을 탄 ‘빈티지한 맛’이 포인트인 옷이라 행여나 뭐라도 묻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조금 더 헤지면 더 그럴싸해 보인다. 덕분에 옷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지막으로는 이 옷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전에는 누가 썼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이 물건을 거쳐 갔을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최근 오사카 여행에서 짱구 영화 중고 팜플렛을 샀다. 한국에 와서 자세히 펼쳐보니 누군가 낙서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곤 난 상상을 시작한다. 짱구를 좋아하는 어느 일본의 어린아이가 연필로 꾹꾹 선들을 긋고 있었을 모습을. 팜플렛을 샀더니 어느 아이의 순수한 동심까지도 데려왔구나 하는 마음에 피식 웃곤 책장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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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물건이란 누가 썼을지 모르는 꺼림칙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는 세상에서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장 인간다운 물건이지 않을까.

 

아쉽게도 나에게 빈티지 옷의 매력을 알려주었던 그 가게는 폐업을 준비 중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마네킹이 한두 개씩 사라지더니, 이제 마네킹은 보이지도 않고 가게는 어수선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빈티지의 사랑스러움이 전해지길 바라며 끄적인다. 정말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면 기존의 생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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