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설치미술가, 바이올리니스트 등 자기 분야에서 일각을 이룬 현대의 예술가가 이미 전설이 된 대가들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유명한 작품 앞에서 옆사람과 팔이 스칠 일도 없이, 그 하룻밤 안에선 작품 한 점 앞에서 시간을 무한정 보낼 수도 있다. 자신만을 위해 열린 미술관에서 작품을 만끽할 수 있는 경험이란 얼마나 낭만적인가. 뮤진트리 출판사가 펴낸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 중 한 권인 <블루 베이컨>은 작가로 활동해 온 야닉 에넬이 평소 흠모하고 골몰해 온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홀로 하룻밤을 보내며 치열하게 감상한 결과로 세상에 나온 책이다.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이란 듣고 상상하기에 퍽 낭만적이고 부러운 일이지만 그 밤을 보낸 후 책을 써야하는 당사자로선 크나큰 압박감에 휩싸였던 모양이다. 베이컨 그림의 애호가인 야닉 에넬은 베이컨의 작품을 40여 점 전시하고 있는 퐁피두 센터에 들어가 혼자 남겨진 순간부터 극심한 편두통을 느낀다.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성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에리니에스의 전언과 함께 눈에서부터 시작해 작열하는 고통은 작가를 지독히도 괴롭힌다.
이 책을 베이컨 그림 입문서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작가는 베이컨의 일생이나 화가로서의 업적, 베이컨의 대표작 등에 대해 일목요연히 설명해 줄 마음이 없다. 이 책에서 베이컨의 그림이 처음 기술되는 순간은 독자가 사십 여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야 만날 수 있고, 칠십 여 페이지까지 작가는 겨우 베이컨의 그림 두 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또한 책에는 의도적으로 도판이 실려 있지 않아 작가가 말하는 그림을 직접 검색해야 한다.
문제는 야닉 에넬이 한창 거론 중인 작품의 기본 정보를 한 장 내에서 천천히, 산발적으로 풀어놓고 있는 데다 작품 이름의 번역명 옆에 작품 원제와 연도가 역주로도 붙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화 장르의 특성 상 한 소재, 주제의 연구를 위한 습작이 여러 점 있을 수 있기에 조금씩 다른 그림이 같은 제목으로 여러 점 있을 수 있다. 베이컨 그림을 꿰고 있는 애호가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도판을 찾는 데서 시간이 걸리고, 또 비슷한 그림들 중에서 어떤 그림을 특정해 글과 연결지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독서의 흐름이 자주 끊긴다는 점에서 역주의 부재가 다소 아쉬웠다.
나는 단어를 통해 베이컨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여러분이 이미지 없이도 내 내면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 책, 특히 그림이 함께 수록되지 않은 책은 그림을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나는 이런 책이 이 같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사색적이고 흥분된 방식으로 “미지의 음식으로 이어지는 길”을 제안할 뿐이기 때문이다. 독자와 내가 공유하는 그 불가사의한 존재는 물론 그림이다. - p. 106
나는 이 책이 베이컨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만든 단어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면 좋겠다. - p. 107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기 위해서, 혹은 작가로서 어떤 활동을 해왔기에 미술관에서 하룻밤 감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전자는 책을 다 읽어갈 즈음에 야닉 에넬이란 사람의 정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지만 후자는 얻지 못한다. 이 책은 ‘베이컨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만든 단어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독자는 그 단어들을 둘러싸고 발화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작가의 내면 세계 속 상징 단어들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이 책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야닉 에넬이 체험한 베이컨의 작품 40여 점과의 하룻밤에 대한 것이다. 독자는 베이컨의 그림으로 다가가는 우회로이지만 <블루 베이컨>을 집어 든 이상 단 하나 뿐인 직진 통로가 된 ‘야닉 에넬의 심상과 눈’으로써 베이컨의 그림을 접하고 감각할 수 있다.
책의 도입부에서 작가의 끔찍하고 지난한 편두통과 함께 줄기차게 언급되는 작가의 내면적 상징은 에리니에스와 성소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천인공노할 죄인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악몽처럼 따라 붙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가 어째서 베이컨의 그림을 하룻밤 감상하기로 한 애꿎은 작가의 뒷통수에 들러붙는가. 에리니에스가 말하는 성소는 당최 무엇인가. 편두통 치료제인 트라마돌의 약효가 돌 때까지, 긴장감을 다스리고자 했던 야닉 에넬이 유년기를 보낸 방을 회상함으로써 성소의 정체에 대한 해답이 먼저 주어진다.
베이컨의 그림들과 대면하며 보낼 하룻밤에 대한 공포는 작가가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보낸 유년기의 방에 혼자 있을 때 느낀 두려움과 중첩된다. 편두통의 고통을 트라마돌이 잠재워준다면, 천장과 옷장에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어린 에넬이 공포를 평정할 수 있게 도운 것은 벽에 걸어둔 그림의 여우 이미지였다. 이 여우는 서아프리카 말리에 사는 도곤족의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 본래 인간이었다가 사회의 규율을 따르길 거부해 동물이 되었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어린 야닉 에넬은 이 여우에 시선이 머물 때부터 혼자 있는 방에서의 공포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이윽고 자신의 방이 글쓰기에 최적화된,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에리니에스가 말하던 성소란 바로 유년 시절의 그 방, 글을 써서 지면 위에 자기 세상을 만들던 그 공간이었다.
여전히 작가가 어린 시절 방에서 느꼈던 과도한 공포심이나,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할 일을 앞두고 뱀 머리칼을 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인자를 단죄하는 에리니에스에게 압박 당하는 연유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베이컨의 그림에 자신이 잡아먹히기를 인정하고 다가갈수록 천천히 밝혀지며, 어느 순간에는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비밀의 상자가 열리기도 했다.
작가가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 유년의 성소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한 이후, 그리고 트라마돌의 약효가 돌기 시작한 후로 그를 괴롭히던 편두통이 힘을 잃는다. 지글지글 끓던 고통의 열기에 비로소 푸른 물방울이 솟아나 돌기 시작했다. 고통에의 자유, 고통 해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그것은 작가에게 푸른색으로 다가온다. 마치 베이컨의 그림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푸른 물줄기의 심상으로. 인정은 곧 분출로 이어진다. 분출은 물리적인 막힘, 정신적인 막힘, 그리고 성적으로 막혀 있던 모종의 에너지가 터져 나옴을 의미하며, 작가는 베이컨이 수도꼭지의 물줄기나 물보라를 그린 작품들을 감상할 때 특히 베이컨의 창작 활동을 성적인 분출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이후 중요하게 다뤄지는 그림은 <앵그르 이후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이다. 이 그림에서 작가는 ‘부은 발’ 오이디푸스의 상처와 피에 주목한다. 작가는 저주 같은 신탁의 내용 그래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오이디푸스를 인류를 대표하는 죄인으로 해석한다.
나는 이 그림의 신비를 알아내려 애쓰지 않는다. 게다가 이 책은 해설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충격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즉 베이컨의 그림처럼 심연으로 가득 채워진 그림들에 다가가면 그것에 흡수될 위험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날 밤 내내 나는 이 그림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면서 이 그림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썼다. - p. 95
작가에 따르면 인류의 죄란 다른 생명체를 죽여 그 존재를 고기로 만들고 그 살육 행위에서 나오는 피는 꺼려하는 데에 있다. 그는 제물에 대해 생각한다. 이어 베이컨이 삼폭 제단화의 형태에 담은 비명 지르는 괴이한 형상들, 그러니까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거론한다. 십자가 책형 주제의 제단화에 그려졌던 독생자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육화한 존재이고 그것을 위해 죽어갔지만, 인류가 살해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고기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에리니에스의 존재와 작가가 베이컨의 작품들 앞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야닉 에넬이 유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지만 정신적 기반을 이루는 문화는 출생지인 프랑스의 것이었을 테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한 부족의 주술과 의례의 현장을 방문했고 거기서 그의 근원적인 공포가 생겼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부족의 마법사는 머리에 (아마도) 살아있는 뱀을 두르고 있었고, 어린 자신은 희생 제물이었던 동물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비명을 지르는 알 수 없는 형체들, 문드러져가는 형상, 변성되며 갖가지 불안정한 색을 보이는 대상들. ‘우리는 모두 고기’라며 계속해서 뒤틀린 몸을 그렸던 베이컨. 잘 덮어둔 유년기의 공포를 건드리는 베이컨 특유의 형상들 앞에서 야닉 에넬은 그렇게 경계하고 고뇌했던 것이다. 자신의 근원적 공포를 건드리기에 베이컨의 그림에 끌렸고 오랜 세월 천착해왔다. 퐁피두 센터가 베이컨의 그림과 보낸 하룻밤을 쓸 수 있도록 그에게만 문을 열어줄 만큼 그의 그림에 천착함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책 속의 도판이 아닌, 작가가 의도한 크기와 질감, 색감을 그대로 간직한 원본 작품 40여 점이 그에게 쏟아낼 에너지는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며 그 에너지는 다른 관객들로 분산될 일 없이 야닉 에넬에게만 고스란히 쏟아질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제물됨을 예감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만약 야닉 에넬이 글 작가가 아니라 화가였다면 그는 두려움의 대상,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낀 특정한 순간을 반복해서 그리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천경자 화백이 화폭에 계속해서 뱀을 그렸던 것처럼. 그러나 야닉 에넬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제물-죽음-피-희생-죄’로 엮여 있는 그 강렬한 장면을 직접 시각화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 키워드들을 자신만의 붓질로 시각화하고 있는 베이컨의 작품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으며,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마침내 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차려 이 책의 집필에까지 이른 것이다. 야닉 에넬은 베이컨의 그림을 보며 창작의 동인을 터져나오는 샘으로 비유하는데, <블루 베이컨>의 독자인 나로서는 그의 내면적 줄다리기를 따라가며 창작은 물론이고 감상의 측면에서도 ‘분출과 해소’가 주요하게 이뤄짐을 알 수 있었다.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 기억, 심상을 제물처럼 내어주는 작가는 작품과의 공명을 거듭하며 그 공명에 대한 방어기제를 한 꺼풀씩 벗는다. 그림에 잡아먹히기를 두려워하다 뜯어 먹힐 수록 외려 자유로워지는 감상의 아이러니함이란. 그림에 빠지기란 결국 전신의 보호구를 내려놓되 보호구의 무게나 이음매 같은 이질감을 더 느끼지 않아도 될 자유를 맞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자유로운 감상은 그가 가장 고대하던 작품인 조지 다이어(베이컨의 연인 중 한 명이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를 그린 그림 앞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트라우마는 감상의 제물로 바쳐지며 어느새 덩치가 작아졌고 그의 공포심은 베이컨 그림 속의 비명으로 함께 분출되었다. 그가 책의 마지막에서 노래하듯, 흐르는 자유는 파랗다. 그의 글을 따라오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원초적인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부피가 줄어드는 과정을 보면서 나 역시 베이컨 작품의 ‘관능, 목소리, 고기’에 대해 알아가고 감상할 준비가 되었다. 책 한 권을 읽었지만 책 한 권 이상의 깊이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