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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시력이 쭉 안 좋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안경을 썼다. 보라색 말랑말랑한 테를 가진 안경. 처음에는 꾸준히 잘 쓰고 다녔을는지 모르겠는데. 중학생 때부터는 특히 썼다 벗기를 자주 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을 때만,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만 선택적으로 안경을 꺼내 썼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녔다. 안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나쁘지도 않았고. 누울 때나 과격한 활동을 할 때 불편하기도 했고. 안경을 쓰면 괜히 더 못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들이 안경과 내 사이를 소원하게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옆자리 앉은 친구와 3년을 붙어 다녔다. 그때 친해지거나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가게 됐다. 친해지고 난 뒤 친구가 나에게 첫인상을 이야기해 줬는데. 안경이었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는 모습이 특이했다나. 그 모습이 뚜렷하게 생각난단다. 주머니에서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나온 안경은. 이리 긁히고 저리 긁혀서 성치 않은 모습이었겠다. 그 정도로 안경과 나는 권태기를 꾸준히 겪었다.


입시를 하면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하여 렌즈가 두꺼워졌다. 그러면서 점점. 안경을 쓰고 싶지 않은 명확한 이유가 생겨났다. 안경을 쓰면 선명해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 나무에 달린 잎사귀, 바닥의 패턴, 작게 쓰여 있는 글씨들,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들. 모두 다 자기주장이 너무 세다. 나를 보라고 여기저기에서 외치는 듯했다. 자극적이다.


의도적으로 안경을 쓰지 않기 시작한다. 시각적인 자극이 꽤 큰 피로감을 주더라. 조금 흐리게 세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확히는 더 좋다. 세상엔 보고 싶은 것들도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들도 많으니까.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계속 모든 것을 뚜렷하게 봐야 한다니. 강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갓 한국에 돌아온 지금.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타고 귀가한다. 건너편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흐릿한 시야를 가지고. 어딘가 생경한 기분에 되짚어보니. 독일에 있을 때는 꾸준히 안경을 썼더라. 기숙사 방 안에서도. 공용 주방에 내려갈 때도. 근처 슈퍼에 갈 때도,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갈 때도. 항상 안경을 썼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기도 하고. 해외니까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내 이동 반경과 루트는 제한적이었고. 독일어로 적힌 정보를 해석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유독 더 좋은 시력이 필요하다고 보긴 어렵다.


나는 유독 한국이 그립지 않았다. 독일이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이방인이 되는 경험이었다. 나를 지나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그저 나를 배경처럼 취급하는 것. 나를 간섭하고 평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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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에 앉아 생각한다. 사람은 단순해서. 생각의 시작이 나에서 출발한다. 내 시선이 곧 타인의 시선일 것이라 여긴다. 내가 먼저 타인을 뚜렷하게 보지 못한다면. 타인도 그러리라 믿고. 내가 타인의 주름 하나까지 볼 수 있다면. 타인도 그러리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풍경은 곧 내 마음의 풍경이라는 말처럼. 내가 타인의 시선이 불편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먼저 불편한 생각을 그들에게 품고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나는 안경을 벗으며. 내가 배경이 되는 기분을 느끼고. 타인을 배경으로 만들어왔지만. 임시방편일 뿐.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구나 느낀다. 독일에서 느낀 사람들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기분은. 어쩌면 내가 그들을 신경 쓰고 평가나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 또한 그러리라 믿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형편없는 시력을 방패 삼아 숨어 있을 때가 아니구나. 시각적 자극이 왜 유독 나에게 피로감을 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그렇게 주었기 때문에. 안경을 쓰고도, 렌즈를 끼고도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자유로운 시선을 장착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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