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잘 쓰고 못 쓰고는 없겠지만, 일기를 잘 쓰지 못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마무리하지 못한 적이 많다. 일기를 쓰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순진무구한 시절의 표백된 추억 같은 게 떠오르는 건 아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감정 조절도 못하는 자신이 싫어 만사 우울했던 어린이가 나였다. 어렸을 적, 가슴 속에 언제나 응어리가 뭉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어휘력과 경험이 부족해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맘에 품고 있으면서 다른 방법으로 발산할 줄도 몰라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는 마치 기계가 쓴 것처럼 보인다. 감정은 꾸며낸 것처럼 건조하게 적고 사실 위주로 기술하는 건 버릇이 되었는지 아직까지도 일기를 그렇게 쓴다. 그 때문인지 일기를 쓰다 보면 이것이 일기인지 진술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중도에 흥미가 떨어져 완성하기를 포기하는 일이 빈번하다.
일기를 쓰다 보면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많다 보니 몇 년 전부터 일기가 쓰고 싶을 때마다 다른 포맷의 글쓰기로 일기를 대신해왔다. 바로 시 쓰기다. 시는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치는 것을 관대하게 허락해줄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역으로 자신의 생각을 직면하고 흘러가는 감정을 기민하게 포착하기를 요구하는 분야였지만, 시를 쓸 때는 일기를 쓸 때와는 달리 그것이 즐거웠다. 고백이 아니라 창작을 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니 일기를 쓸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일기 대신 메모장에 시를 적고 그 시를 다시 읽어내리다 보면 시 쓰기는 단순한 성취감과 치유 이상의 무언가를 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기를 쓰고 나면 후련해지지만, 일기를 쓰면 내 감정과 순간이 소중해진다. 시를 쓰기 위해 비워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5년동안 내게 헌정하는 시를 써온 아마추어 시인으로서 한 가지를 맹신하게 되었다. 시 쓰기는 자신을 아껴줄 수 있게 만들어준다.
반성과 정화의 글쓰기
스무 살이 되고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역에 홀로 살게 된 후, 대학에 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손에 쥐어진 것은 막대한 책임감과 황망한 기분 뿐이었다. 아는 친구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염병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어려우니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파먹는 것 같았다. 공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 이 감정을 비우고자 무턱대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특별히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쓴 것이 아니라 방구석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를 쓰는 건 습관이 되었다.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수선했던 감정이 놀랍도록 빠르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냉정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 시들을 읽으면 심장을 직접 어루만지는 듯해 흠칫 놀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직접 건네는 위로인지라 이만큼 쉽게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없다.
아래는 스무 살 때부터 문득 문득 들었던 단상들과 감정들을 시의 형식으로 옮긴 것들이다. 갈 곳 잃은 감정을 몇 구절만으로 정돈할 수 있다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온전한 이별
노을에 그을린 잎사귀 사이로 주마등이 스친다
보금자리를 영원히 떠나는 동물은 없다
마저 걸었다
정든 품을 통과할 땐 조금 울었다
때는 어슐러 K.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난 직후로, 스물 한 살 때 쓴 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성인 중에서도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그 당시는 모든 일 앞에서 긴장해 있었고 미래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쌓아온 인간관계의 내구성을 시험받는 시기라고 생각해 작은 신호에도 민감해지는 등 감정 기복이 무척 심했다. 친구들과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불안에 관한 것이었으나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시기였기에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나눌 수 있는 건 서로의 불안 뿐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난 후 예측 불가능한 미래 때문에 애닳는 것보다도 지금을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줄곧 자신을 평가하고 재단하면서도 정작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읽는 책 속 광활한 세계관의 품은 그만큼 너른 인류애를 나누어주었고 감정에 매몰되기보다 내면에 깊이 침잠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을 필요를 되새겼다.
물론 슬프기도 했다. 가슴은 불안에 떨리지만, 머리로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스무 살 이전의 세계와 어느 정도는 결별해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쓴 시가 <온전한 이별>이다.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한 시절을 떠올렸다. 이따금씩 그리워지는 시기는 마음속에 간직하기로 하면서 우울한 시기를 천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완전한 이별'이 아니라 '온전한 이별'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극적으로 한 사람과 다시 인연이 닿게 되었다. 이건 아직까지도 신기하게 생각한다. 시에 어떤 효험이 있었던 걸까? 그런 신기한 경험과 지나간 시간이 중첩되면서 다시 읽어봐도 퇴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완전한 시라고 여기게 되었다.
반사
보슬비가 느끄름하게 내린
어느 간절기 쌀쌀했던 저녁
갈게요
젊은 여인은 빈 집에 고했다
탕난 쥐색 코트를 걸치고
한 손엔 정리하지 못한 과거를 들고
철사로 지탱한 듯 마른 뼈대의 여인의 뒤를
추저분한 사랑과 미련과 번민이 휘청거리며 따라온다
땅을 밀어 튀어 오른 모래와 자갈이 구둣발에 흠집을 내도
자신의 영혼은 이따위 것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어떠한 결의로
도통 돌아볼 줄을 모르는 여인이 나아간다
함께할 수 있었던 미래 현명하게 굴 수 있었던 과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찌하여 그러지 못했는가
주마등을 잠식하는 필연적인 어둠을 향해
좀처럼 멈추지 못하고 심연을 헤쳐 나가는 발걸음만을 믿는
그 여인이 눈을 감는다
더는 보지 않는다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다 보면 누군가의 모습을 자꾸 닮아가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무언가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은 보고 있으면 언제나 좋은 자극을 느끼지만, 못난 맘이 들 때도 있다. 이 시에는 가끔 느끼는 지독한 열패감을 쥐색 코트의 곰팡이로 표현했다. 탕난 코트라면 버리는 게 현명한데, 이 감정은 미련처럼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새 나를 좀먹고 있는 묵은 감정이기에 그런 모양이다. 언제나 초연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나보다 '어른'인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코트도 나처럼 탕났을까 괜히 들춰보고 싶은 못된 맘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시기질투에 새로운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분명 젊지만, 한 해를 넘길수록 조금씩 성숙해지는 걸 느낀다. 가령 과거 연락 텀 때문에 안달복달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연락 텀이라는 얄팍한 수단을 가지고 타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쓸쓸한 맘으로 썼던 이 시는 지금 보면 사뭇 다른 감상을 준다. 시를 읽으면 여인이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서기까지의 시간을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여인의 결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은 시련에는 좀처럼 지치지 않는 연륜은 구둣발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치부를 당당히 두르고 나아가는 그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기보다 시의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시간이 흘러 자신에게 달라지는 의미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준다는 데 있다. 과거의 자신과 자신의 차이를 비교해보면서 자학이 아니라 성장과 변화에 주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를 살리는 망각
나를 생각하는 맘은 모퉁이가 둥글어서 와 닿는 순간마저 통 튀어버리고 / 그래서 나도 조금은 수줍어지고 / 받아들면 동그래서 내 작은 손으로도 그러니까 작은 품으로 받을 수 있기에 / 그 무게를 가슴 언저리에서 느끼고 / 나를 얼마나 생각하면서 모퉁이를 접었으면 이렇게 둥글어졌을까 / 그래 나를 생각한 만큼 접었겠지 / 손의 열기로 따뜻해진 일로 이건 열렬한 사랑이라 쉽게 착각하고 / 발을 동동 구르다 주머니에 쏙 넣어버리겠지 / 그러다 잊어버리는 거지 / 빨래 돌리기 전 주머니 뒤척이다 잡히는 게 있으면 / 문득 떠오르는 거지 / 하루종일 이 맘을 나눠 먹는 거지
소중한 친구의 졸업을 축하하며 편지의 두 번째 장에 써준 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은 언어보다도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더 잘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편지는 선물만 건네주는 게 왠지 면구스러워서 쓰곤 했지만, 시를 쓰게 된 후부터는 형식 이상의 마음이 깃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옆에서 봐온 친구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타인을 진심으로 위로해줄 줄 아는 다정함을 지녔지만,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자존감을 잃거나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면접관이나 동료는 볼 수 없어도 내가 봐온, 나에게 나눠준 그 마음을 친구에게 돌려주고 싶어 시를 썼다. 망각하고 있을 뿐 주머니 속에 있는, 일상에서 어쩌다 다시 발견하게 되는 그 마음을 나눠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보내는 응원이었다. 에둘러 표현하니 이 시가 어떤 감각으로 가 닿을지 편지를 건넬 때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음이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친구가 편지를 읽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의 감정이 언제나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특별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은 자존감을 지키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기를 쓰는 게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글쓰기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비워내지 않고도 시를 씀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천천히 본질에 접근해가며 자신의 마음을 특별한 방식으로 남기는 것은 허무한 낭만이나 민간요법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마음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을 때 펜을 들어 눈앞에 그려지는 심상을 한 번쯤은 재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