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더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사람이 누구나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은사가 되어준 사람, 죽음의 공포를 맛본 순간 등 그 종류는 다양하다. 이 중에서도 아름다운 추억과 그 추억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괴로울 지경이면서도 그 때문에 점점 선명하게 살아난다.
영화 <화이트 버드>는 유대인들이 경험한 나치의 공포 속 꽃피운, 트라우마를 동반하면서도 결코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유대인 소녀 '사라'와 다리를 저는 같은 반 친구 '줄리안'은 나치의 위협에서 줄리안이 사라를 구해주며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세계가 되어준다.
<화이트 버드>는 어둠 속에서도 사라가 발견한 희망을, 절망적인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정의 필요를 우리에게도 요청하고 있었다.
어둠 속 한 마리의 '화이트 버드'가 되어줄 사람과 사랑을 위해
<화이트 버드>라는 제목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화이트 버드>는 평화의 가치를 설파할 것만 같지만, <화이트 버드>는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집중한 듯하다.
영화는 사라가 학교폭력으로 퇴학당해 새 학교에 가게 된 손주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해 사라 시점의 과거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신 또한 신변의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을 집에 숨겨주겠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시험하는 딜레마를 다루는 문제가 된다. 다만 <화이트 버드>는 이 딜레마를 대놓고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선의의 편에 서서 누군가의 용기를, 다정함을 건네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역설할 뿐이다.
여기에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문을 열어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의에 쫓기는 도망자의 입장에 얼마든지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작은 호의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타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이 숨기고 있거나 품게 될 수 있는 악의를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받은 절대적인 호의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감정이자 인간을 향한 믿음의 양분으로 남을 것이다.
두려움은 쉽게 전염되지만, 이러한 따뜻한 기억 또한 타인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베풀 수 있는 또 다른 호의의 근간이 된다는 걸 <화이트 버드>는 분명히 전하고 있다. 줄리안과 사라 사이에 자리잡은 로맨스는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연애 감정 외의 층위에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 버드> 속 비극적인 시대배경은 로맨스를 더욱 아름답게 꾸며내기 위한 대비의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두 사람의 로맨스는 차별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폭로하고 있다.
소년 소녀의 사랑은 함께하는 시간과 솔직한 대화를 통해 성사되는데, 결국 인종 대 인종과 같은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친구 대 친구, 사람 대 사람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대하면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사랑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영화를 보면서 수십 명의 KKK 단원의 마음을 돌리고 스스로 KKK에서 탈퇴하게 만든 대릴 데이비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흑인 뮤지션인 그는 KKK 단원을 계몽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그들에게 대등한 위치에 선 친구로 다가가 자신이 그와 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만들었다고 한다. <화이트 버드>에서도 두 주인공이 서로를 줄리안과 사라로 제대로 호명할 때 두 사람은 비로소 친구가 된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인정하면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모든 수식어는 쓸모를 잃게 된다.
서로의 상황이나 특징을 이용하거나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의 존중의 관계는 그 어떤 슬로건보다도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줄리안과 사라의 입장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런 극적 장치가 서로를 이해하려면 서로 비슷한 입장에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줄리안이 사라를 도운 것은 동기와는 별개로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줄리안은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고 자신에게 누군가 그래주기를 무의식중에 바랐을 행동을 반사적으로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타인에게서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손을 내미는 일은 숭고해보이기까지 한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화이트 버드> 속 줄리안을, 세계 어딘가에 있었고 지금도 있는 선한 누군가를 떠올리면 모두가 손을 내밀어주는 세계를 상상하게 된다. 서로 달라도 공감은 가능하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잊을 수 없는 미지의 다정의 세계를 <화이트 버드>는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한 편은 오늘도 불길에 휩싸여 있다.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을 지라도 내가 나눌 선의를 언제나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나오겠다고, 그런 다정을 언제든 베풀 준비를 하겠다고 작은 결심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