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 가야겠다는 결정적인 계기는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이었다. 영화 속에서 삶과 죽음이 자꾸 교차하는 장면들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뭔가 내 삶과 연결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아이처럼 행동하는 순간과 아이들이 때로는 어른처럼 보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삶의 어느 시기에 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혼란이 주는 안도감이 분명 있었다.
타이중과 타이베이를 5박 6일 동안 여행하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 공간들이 실재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을 느꼈고, 동시에 그 안에서 그 감정을 관찰하는 경험도 흥미로웠다. 스물다섯 살 먹은 영화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타이중 (Taichung) - 동해대학교 문학관, 문리대도, 과학관
배를 채우기 위해 유제품 가게부터 방문했다. 농대가 있어서인지 동해대학교 이름을 딴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우유가 가벼운 물 같은 질감인데 진한 맛이 났다. 크림 퍼프와 아이스크림도 부드러운 맛이 좋았다.
미션 스쿨인 동해대학교는 루체 교회의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두막 같아 보이기도 하고 피라미드 같기도 한 교회 건물은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이오 밍 페이의 작품이다. 방문한 날이 일요일이라 오전, 오후 예배 사이 잠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유리창이 건물 내부로 빛을 내주고 높이에 비해 좁은 천장 폭 덕에 웅장함과 동시에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시작에는 삼촌의 결혼식을, 끝에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보여준다.이 두 장면은 모두 동해대학교에서 촬영되었다. 루체 교회 뒤쪽으로 가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담당하는 장소들이 나타난다. 일단 결혼식의 사진을 찍은 문학관 앞으로 이동했다. 루체 교회의 미려한 내외부를 볼 때도 설렜지만 이때부터는 이미 영화 속 풍경이었기에 심장이 세차게 떨렸다.
NJ의 가족이 결혼 사진을 남기는 곳은 동해대학교의 문학관 앞이다. 나무가 좀 더 우거지고 입구에 달린 전등이 사라진 것 말고는 영화 속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족 모두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가는 시간 속에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결혼식 장면 직후 할머니는 사고를 당하고, 그 후 가족의 삶은 이전과는 달라진다. 어른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며 감정을 정리하려는 동시에 아이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숨 쉬며 성장한다. 첫 결혼식 장면에서는 누구도 뒤따를 사건을 알지 못한 채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건들의 무게가 더해져간다.
양측에 예술관과 과학관을 둔 문리대도는 주민들과 관광객이 느긋하게 걷는 산책로였다. 일요일에 교회를 방문한 주민들에 더해 동해 대학교에 찾아온 관광객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건물과 길 사이 난 잔디에는 여러 가족이 모여 앉아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장소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펼쳐지는 것을 보니, 영화 속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체험하는 것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
하나 그리고 둘은 생과 사가 끈끈하게 얽혀 있는 이야기다. 태어나는 순간과 죽음의 시간이 얼마나 가까운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 사이에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기도 하고, 가끔 멈춰 서고 싶은 순간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나 그 시간은 공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곳에서 촬영한 결혼식과 장례식 장면은 생사를 적절한 구조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죽음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 존재로 느껴졌고, 그로 인해 부쩍 슬픔을 자주 경험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이 향한다는 것이 단순한 감정의 근원이 아니라, 모두의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주 속 작은 존재로 시작도 알 수 없이 태어난 것처럼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끝이 있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그 후 어떻게 살더라도 죽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저 하루하루를 더 즐겁게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새겼다. 그 기억은 어두운 순간이 아니라 동해대학교에서의 하루처럼 바람이 적당히 불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볕을 쬐며 보내는 그런 평온함으로 남아 있다.그 기억이 타이중 대학교에서 다시 떠올랐다.
타이베이 -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 (원산대반점)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은 대만을 대표하는 오성급 호텔로, 1952년 대만 신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 호텔은 대만의 정치적, 역사적 중요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1990년대까지는 국빈 방문이나 중요한 외교 행사에만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999년 하나 그리고 둘이 촬영될 당시 이 호텔은 대만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그들의 삶을 엮어내는 데 있어 매우 적절한 배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 웅장한 분위기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고풍스러운 내부 모두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호텔의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모두 이 공간이 주는 압도감을 공유하는 듯했다.
영화 속에서 친척 누나들이 양양의 신발을 던지는 장면에서 나온 중앙 계단에 올라갔다. 결혼식 피로연에 끼지 못하고 혼자 신발을 주우러 다니는 양양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장면은 편집되어 칸 영화제 포스터로도 사용되었다. 카페트가 조금 더 화려하게 교체되었지만 전등이나 기둥의 사소한 부분은 모두 같아서 비교하며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말없이 아빠 옆에 기대어 지루함을 죽이는 양양의 모습이 참 좋았다. 어떻게 아이라고 늘 밝을 수가 있을까 어린 시절을 돌이켜봐도 감정을 느끼는 범위가 크게 달라짐은 없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될 때면 유년기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에서 양양은 어린 시절을 반추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알지 못했던 감정을 일깨워준다. 특히 호텔 장면에서는 양양이 쉬이 다뤄지는 어린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바라보게 된다.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에 발을 들이기 전, 그 건물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그 웅장함과는 또 다름이 인식된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 촌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그니쳐가 되었기 때문이다. 붉은 기둥, 잘 관리된 카페트, 그리고 석재 재질의 벽면들이 오히려 시간을 지나면서 더 고풍스럽게 보인다. 전혀 낡아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흘러도 그곳의 느낌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세월이 더해져 이곳만의 깊이와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깊이는 시간 속에서 쌓인 가치와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타이베이 - NJ 가족의 집
아파트 외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팅팅이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좋아하게 되고 할머니의 사고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커진다. 오해받고 선 밖으로 밀려나오면서도 화를 내지 못하는 팅팅이 안쓰러웠다. 당시에는 괜찮지만 지나고나면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는지 울화가 치미는 일들이 있다.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삭이면서 어두운 도로를 걸어가는 팅팅이 감정을 표출하길 바라면서 연민을 느꼈다. 특히 종단에 이르러 밝혀지는 비극이 그 마음을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비 내리는 배경의 아파트 장면들은 그래서인지 습하고 축축하다. 곧 마르지만 한번 쏟아질 때 전부 젖어버리는 타이베이의 비처럼 팅팅이 감각해가는 세상도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타이베이 - 집 앞 거리들
영화에서의 설정과 마찬가지로 집 앞 거리들은 아파트 바로 앞이다. 덕분에 찾아보지 않고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팅팅과 리리의 남자친구가 만나는 장면들이 담긴 고가도로 아래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 화단 쪽에 그려진 낙서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도로 사진을 열심히 찍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도로가 그대로 남아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시간을 한참 보내버렸다.
팅팅이 비오는 날 서 있던 횡단보도도 뒤쪽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옆 건물은 세탁소가 생겼고 세월이 지나 나무들이 더 우거져 있었다. 대만에서 가장 신기하고 좋았던 점인데 도심에 나무들이 (가로수조차)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영화 속 장소들이 대부분 그대로다보니 골목마다 갑자기 우람한 나무들이 나타나곤 해서 자꾸 걸어다니게 되었다.
타이베이 - 용안 초등학교와 육교
아마 영화 촬영지 중 가장 많이 변화한 곳은 양양이 초등학교-육교-사진관을 거치는 그 장소들일 것 같다. 양양이 뛰어가는和平新生 육교는 안전 상의 문제로 2024년 11월 4일부터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양양이 빠지는 학교 수영장도 시간이 흘러 실내 수영장으로 바뀌었다. 사진관 역시 다른 업장이 자리잡았다. 방문했던 날 초등학생들의 하교 시간이라 촬영은 어려워 시간이 조금 가진 후 건물 뒤쪽을 따라 걸었다. 대걸레를 빨아 순서대로 널어놓은 모습에서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뒷편을 걷다가 마구 뛰어오는 어린이들을 마주치면서 영화 속 장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되는 경험을 했다. 그대로 남아있는 장소들을 찾는 것도 즐거웠지만 용안 초등학교에서는 그것만이 추억하는 재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순되지만 장소란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불쑥 떠올랐다. 전혀 다른 공간이라도 냄새나 소리 아니면 전신주의 형태 같은 황당할만큼 사소한 것들이 그 공간으로 이끄는 것처럼 추억하는 방식은 너무나 다양하다.
너무 좋은 순간을 마주하면 글로 썼을 때 감동이 반감될까 욕심이 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장소 하나하나를 갔을 떄의 감정을 서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여정이 내게 의미 있었던 것은 개봉 후 25년이 지난 영화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직접 본 그 자체였다.
여행을 마치고서 양양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고 다니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본 것만큼이나 강한 인상이 든다고 해야할까. 자료를 찾아보다 이 마음을 잘 설명하는 문장을 만났다. "사라짐은 진정한 존재다." 만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뇌리에 새겨진다. 모든 장소에서 그랬다. 영화에 담긴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나는 이 여행에서 공간이 아닌 그들이 본 시야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스크린을 넘어 만난 세계는 기억 속에 오래 남겨질 것이다. 좋은 영화들이 내 기억만큼 선명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