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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백남준, 유명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예술가이다. 부산현대미술관에 백남준 전시가 열려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토요일에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일요일에 부모님과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부산현대미술관과 백남준아트센터가 공동기획한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 그리고 어멘다 킴 감독의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두 작품은 무서운 속도로 굴곡을 내며 가는 시대에 앞장 서서 걸은 예술가 백남준의 전기이다. 흔히 전기는 인물의 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을 중심으로 시간대에 따라 구성되지만, 나는 여기서 백남준의 일생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남준을 있게한 예술, 예술을 하는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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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나인필름,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메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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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을 있게한 예술

 

백남준은 전위 예술(아방가르드)에 큰 매력을 느꼈다.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백남준은 한국에서 아방가르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렇게 시작된 독일로의 유학은 예술가 백남준의 창세기가 된다. 1956년의 독일 뮌헨.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동양의 예술은 예술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의 미술과 음악만이 존재했다. 1958년의 어느 밤, 백남준은 선불교의 방식을 차용하겠다며 나선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의 콘서트에 가게 된다. 관념에서 벗어난 우연성에 의한 작곡을 하겠다며 우스꽝스럽고 알 수 없는 짓들을 한다. 관객은 야유했지만 백남준은 전율을 느낀다. 이후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의 중심 일원이 된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깨부수기’를 시작한다.

 

바이올린을 깨부수고, 피아노에 테러를 하며,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버린다. 현대 예술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그리 놀랍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그의 시대를 가늠해 보았을 때 그것은 공연장에서 벌어진 매우 전격적인 시위이다. 백남준이 깨부순 것은 서양음악의 상징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를 향한 그의 분노는 시각적 파괴로 발현되었다. 백남준의 예술은 그가 깨부수고 싶은 예술과 그가 선망하는 예술이 접속하여 탄생했다. 클래식 음악을 배우며 전위 예술을 접한 백남준은 고전의 틀에 박힌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바로 그때 바이올린과 피아노에 금이 갔고, 예술계의 굳어있던 ‘유럽주의(Europism)’에도 금이 갔다.

 

 

예술을 하는 백남준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백남준은 대부호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 시기의 부자란 곧 부패를 의미하기에, 그는 아버지가 수치스러웠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암흑의 시대가 이어질 동안 고국을 줄곧 떠나있던 백남준은 본인의 좌파 성향이 문제가 되어 잡혀갈까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가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고, 부잣집 아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 나갈 때, 이러한 그의 배경은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백남준은 예술을 소통이라고 했다.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선’(線)이다. 정보가 선을 따라 발신자에서 수신자로 가닿는다. 플럭서스 활동의 일환이었던 혁명적 액션뮤직부터 말년까지 이어진 비디오 아트는 모두 선을 그리고, 선을 이용하고, 선을 왜곡하고, 선을 응시하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요약건대 이는 소통을 위한 다양한 방법론의 결과이다.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큰 소리를 낼 것이냐, 에둘러 빗대어서 말할 것이냐, 반어법을 사용할 것이냐 하는 선택들 사이의 한 점이다.

 

한국인이자 동양인이라는 백남준의 출신적 정체성은 서양에서 활동함으로써 더욱 두드러졌다. 사실상 존재만으로 이미 그의 예술이 갖는 목적성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암울한 한국 사회에서 본인만은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생을 포기하고 굶주렸던 것 또한 그러하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에 휩쓸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시대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새로운 기술에 계속해서 반문하는 것이 그가 평생을 바친 일이었다. 즉 순응하고 누리는 삶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내된 점선을 자꾸만 벗어나서 새로운 직선을 긋는 일이야말로 백남준이 추구하는 예술이자 소통의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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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

 

 

백남준의 예술

 

“나는 기술을 혐오하기 위하여 기술을 사용한다”

 

TV를 시작으로 인터넷과 AI까지, 현대사회를 휩쓸고 있는 전자기술혁명들에 백남준의 선견은 끊임없이 호출된다. 백남준은 전자로 이어진 세상을 ‘전자 초고속도로’라고 명명했다. 칭기즈칸이 역사 속에서 동서양을 잇는 고속도로를 뚫어 지배했던 것처럼, 이제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전 세계가 이어진 시대에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새벽 대뜸 전화를 걸어 정정했다. “내가 틀렸어. 정보의 고속도로가 아니야. 우리는 바다 위 배에 있고 해안이 어디인지 몰라”

 

백남준은 일방향 미디어의 마지막 줄기인 TV를 소재로 참여예술을 시도했다. 관객이 TV에 대응하며 참여하길 바랬다. 그러나 이 기술의 본질에 대한 사유 끝에, 수직적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상호소통의 환경에서 맞이하게 될 기술 문명의 새로운 국면을 예견하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백남준과 예술의 관계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가 기술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감각’과 ‘철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백남준은 청각에 국한되었던 음악을 시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비디오아트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1963년 독일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에서는 자석으로 전파를 방해하여 영상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내부회로를 조작하여 특정 형상을 만드는 등 13개의 화면이 제각기의 영상을 송출했다. 이후 휴대용 카메라가 출시되자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합성하여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비디오 아트의 시작을 알렸다. 기계가 개입한 미술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망설이던 시기에 백남준은 과감히 미래 세대가 우르르 몰려올 숲의 길을 열었다. 전자회로를 열심히 공부하고 들여다본 덕에, 그는 영상 이미지의 가변성이 가져올 감각 경험의 전환이 21세기의 예술을 열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인 TV 부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종류로든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부처는 TV 앞에 점잖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런 부처를 찍고, TV 화면에는 카메라가 비추는 부처의 모습이 송출된다. 그렇게 미동도 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어떤 이는 이 숨 막히는 대면을 보고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떠올릴 것이고, 다른 이는 정신적 수양을 강조한 ‘동양’의 지혜와 물질 중심의 ‘서양’적 사고의 충돌을 생각할 것이다. 혹은 TV의 어리석음을 꿰뚫고 있다는 부처의 경고로 볼 수도, 아니면 TV를 통해 광역으로 전해지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볼 수도 있다.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하고 백남준 또한 관객이 자신만의 뜻으로 TV 속 부처와 마주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는 참여하길 바랐다. 불상의 주위로 다가와 카메라에 포착되어 스스로 TV의 이미지가 되어보기를. 나는 TV 부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조금 포괄적으로 개괄했다. 철학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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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TV 부처 >

 

 

한편, 기술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통찰했던 백남준이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통해 제시한 미디어에 의한 감시사회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의외였다. 그러나 기술의 앞서감을 경계하면서도, 전자매체가 적어도 ‘소통’에 있어서 백남준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자유’를 부여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그 자유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조지 오웰의 방식으로 논점이 옮겨가겠지만 말이다) 이는 그가 새로운 소통방식을 환영하고 사회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던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한다. 자유를 좇아 확장하는 소통. 백남준이 남긴 수많은 TV 화면들, 장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로봇, 전파에 올라탄 불상, 전 세계로 뻗어나간 위성 생방송, 그리고 질질 끌려다니던 바이올린. 지금 우리는 백남준이 희구하던 대로 소통하고 있을까.


*

 

백남준은 악필이었다고 한다. 또 20여 개의 언어를 할 줄 알았지만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고도 한다. 그는 분명 악필의 편지를 전송했지만, 우리는 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서 더 유심히 뜯어본다. 그 과정에서 타이핑된 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심지어는 그가 써두지 않은 것까지도.

 

‘앞’을 내다본 예술가로 백남준을 찬미하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안’을 들여다본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백남준은 차가운 기계 속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인간 속을 따뜻하게 들여다본다. 나는 예술을 잘 모르지만, 무언가를 정의 내릴 수 없을 때는 예시를 들어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 백남준은 예술로 태어나 예술을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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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다롱대디
"나는 그보다 ‘안’을 들여다본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백남준은 차가운 기계 속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인간 속을 따뜻하게 들여다본다. 나는 예술을 잘 모르지만, 무언가를 정의 내릴 수 없을 때는 예시를 들어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 백남준은 예술로 태어나 예술을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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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님이 표현한 예술가 백남준님에 대한 소회가 너무 공감 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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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8 10:09:5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