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직전 수강한 교양 수업에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Whiplash, 2014)를 다시 보았다.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학생 ‘앤드류’와 유명하지만 폭력적인 교육법을 가진 교수 ‘플레처’가 등장인물. 플레처의 눈에 들어 그가 지휘하는 재즈 밴드에 들어간 앤드류는 플레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인 생활이 망가지도록 연습에 몰두하고, 심지어는 교통사고가 난 직후에도 공연을 하러 들어간다.
위플래쉬
교통사고 후 피를 흘리며 공연장에 들어서는 앤드류의 모습은 정말 ‘광기 그 자체’다. 수업 시간 토의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역시 ‘광기’였다. 근래 들어 밈으로 쓰이는 광기는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쓰는 광기와 결이 다르긴 하지만, 꼭 광기라는 단어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열중하기를 장려하는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00에 미쳐라’, ‘00년만 미쳐라’, ‘미치지 않으면 00할 수 없다’ 류의 자기계발서가 예전부터 존재했고 요즘은 영상으로 포맷만 바뀌어서 새로 나온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 파고들어야 한다. 미친 것처럼 보일 만큼.
조별 토의를 하며 받은 가장 충격은, 플레처의 교육법에 호의적인 목소리가 더 크다는 사실에서 왔다(최소한 우리 조 안에서는). 플레처의 광기가 과한 것도 사실이지만, 과했기 때문에 앤드류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플레처에게 나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학우들도 ‘강한 자만 살아남는 예체능 계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거나 ‘다른 학생에게는 위험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앤드류에게는 효과적이었다’ 말했다.
그 가운데 나 혼자 플레처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플레처가 잘못된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과한 건 과한 거고, 미친 건 미친 거다.
그래, 난 이 광기라는 친구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광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미치지 않으면 일류가 될 수 ‘없는’ 사회, 혹은 일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를 부정하고 싶어서? 모든 걸 잡아먹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보다, 손발이나 간신히 데워주는 따끈한 불씨가 더 취향이어서? 아니면 그냥 내가 전 세계의 하향평준화를 원하는 게으른 와(臥)식생활주의자라서?
업스윙잉
처음부터 플레처를 혐오했다지만 내가 그를 ‘극혐’하는 단계에 이르게 한 계기는 따로 있다. 교통사고 후에 플레처의 밴드에서 잘린 뒤 ‘방황’하던 앤드류는 우연히 플레처와 마주치고,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카네기 홀 공연에서 드럼을 연주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이 무대는 오롯이 앤드류를 엿먹이기 위해 플레처가 설치한 덫이다. 사고 후 앤드류는 고민 끝에 플레처를 가혹행위로 신고했고 플레처는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었다. 플레처는 다시 만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콤한 제안을 하는 척했지만, 실은 제대로 된 연주 목록을 전달하지 않았다. 무대에 오른 앤드류는 전혀 모르는 곡인 <업스윙잉>을 아무 준비 없이 맞닥뜨리고, 꿈의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과 관계자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욕적인 경험을 한다.
영화 중반까지는 그래도 플레처의 광기가 음악을 향한 사랑과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포장해 볼 수 있었다. 그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여전히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영화 속 인물로만 본다면 꽤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끝없이 스스로를 끌어내린다.
플레처는 앤드류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신의 무대마저’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실은 그 이상이다. 앤드류뿐만 아니라 그 무대에 기대를 걸고 있었을 다른 뮤지션들의 커리어, 다른 관객들의 경험도 플레처 때문에 망가졌다. 심지어는 플레처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음악까지도. 그의 광기 어린 질주가 줄곧 완벽한 무대를 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 장면에서 플레처는 그 무대까지도 내버린다. 그렇다면 그가 내지르는 주먹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그의 광기는 무엇을 위한 광기인가. 플레처의 광기는 그것을 포장할 명분조차 잃어버렸다.
내가 광기를 거부하고 싶은 이유를 조금 찾은 것 같다.
카라반
플레처는 그렇게 짓밟힌 앤드류가 다시는 드러머로서 세상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겠지만, 주인공이라 함은 의외의 면모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앤드류는 <업스윙잉>의 굴욕에 도망치듯 떠났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무대로 올라와 드럼 앞에 앉는다. 그러고선 플레처의 지시도 없이 멋대로 다음 곡을 시작한다. 앤드류의 돌발행동에 다들 당황하고 플레처는 분노하지만, 결국 플레처도 그와 합을 맞추며 성공적으로 곡을 마무리한다. 밴드의 연주가 끝난 뒤에도 앤드류는 강렬한 드럼 솔로를 이어간다. 음악에 열중한 앤드류와 플레처의 모습이 번갈아 스크린에 비치며 보는 사람의 뼈까지 부서질 듯한 솔로가 끝나고, 영화도 함께 막을 내린다. 이 곡의 제목이 <카라반>.
이 아래는 재즈라는 장르나 해당 곡에 대한 이해도 없이 순수하게 제목의 단어가 주는 첫인상을 바탕으로 떠올린 단편적인 해석이다. 영화의 제목이자 가장 여러 번 나오는 곡 <위플래쉬>(Whiplash)는 채찍질이다. 이 곡을 연습하고 연주할 때 앤드류는 실력이 늘지언정 매일 피를 흘리며 플레처에게 휘둘린다. 앤드류에게 모욕을 안겨주는 곡 <업스윙잉>(Upswinging)은 호전(好轉)을 뜻한다. 플레처의 관점에서 앤드류는 이 상승기류에 동승하지 못하고 ‘도태당한다’.
하지만 마지막 곡은 <카라반>(Caravan). 에스닉한 분위기를 가진 곡이기에 사막 지역에서 낙타 등의 동물에 짐을 싣고 다니는 상인 집단을 뜻하는 ‘카라반’을 제목 삼았다는데, 사실 나에게 카라반이라고 하면 다른 것이 먼저 떠오른다. 자동차 뒤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이동식 주택, 카라반. 앤드류는 영화 내내 플레처의 채찍질에 휘둘렸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카라반>을 연주할 때는 아니다. 곡의 처음과 끝은 물론 완급을 조절하는 권한까지 모조리 앗아온 그 순간을 장악한 것은 플레처가 아닌 앤드류였다. 카라반을 이끈 것은 앤드류, 끌려간 것은 플레처다.
위플래쉬 V 카라반
주인공은 언제나 의외의 면모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의외여서는 안 된다. 그가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하는 게 아니고, 관객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답다고 납득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의외성.
앤드류가 마지막 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하며 일종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에도 결국 광기가 있다는 것이 우리 조원 다수의 의견이었다. 플레처의 광기에의 종속이든, 동화이든, 대적이든, 어쨌든 앤드류에게도 그만큼의 광기가 있었기에 이 열광적인 무대가, 시쳇말로는 ‘레전드 무대’가 완성된 것이라고. 광기를 이겨낸 것도 결국 광기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 탓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앤드류가 교통사고 이후 보낸 ‘방황’의 시간이 들어왔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잊고 살던 가족을 만나고, 연락이 끊긴 친구도 괜히 한 번 떠올려 보는, 그런 무료한 일상. 그 시간은 꿈도 희망도 없는 우울한 시간, 하염없이 낭비되고 있는 공백처럼 그려진다.
***
이 공백은 드럼에 몰두해 있던 시간과 전혀 다르다. 몰두해 있을 때의 앤드류는 일상을 살기는커녕, 주변 사람들과도 싸우고 완벽히 단절되어 있었다. 당시 그의 유일한 목표는 완벽한 연주를 해내는 것, 아니 플레처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다.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그에게 경외심이 들면서도, 그가 지금 그토록 바라던 최고의 드러머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앤드류가 자신이 지금 어딜 보고 있는지,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걸까? 그냥 당장의 채찍질이 고통스러워서 쉼 없이 뜀박질하는 게 아닌가?
경주마처럼 달리던 앤드류가 멈추는 건 강제로 찾아온 공백 때문이다. 흔한 비유처럼 ‘쉼표’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공백’이라 말하는 이유는 당시 앤드류는 드럼을 잠시 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드러머라는 꿈을 접을 생각이었다. 다신 드럼 채도 쥐지 않고 다신 드럼 소리조차 듣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거리감이 그를 다시 드럼 앞으로 이끈다. 재만 남은 그를 달군 것은 또 다른 불길이 아니라 숨어있던 불씨와, 공백이 불어넣은 숨결이었다.
영화에서 앤드류가 공백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묘사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앤드류가 중간의 사고 없이 쭉 플레처의 제자로 남았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보면 그에게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할 수 있다. 플레처의 제자인 앤드류는 실수가 생겼을 때 바로 무너졌을 것이다. 지금의 앤드류처럼 곡 하나를 완전히 망친 뒤에 다시 무대에 올라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플레처의 제자로 남은 앤드류라면 충분한 연습을 거쳤으므로 애초에 실수할 일이 없지 않겠냐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업스윙잉>을 완벽하게 연주할지언정 절대 <카라반>의 운전석을 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수업에서는 <위플래쉬>를 포함해 여러 작품을 보았고 그 선정 기준은 ‘도전’이라는 키워드에 부합할 것이었다. 자연스레 이 영화가 무엇을 향한 도전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토의 중에 나왔다. 악덕 교수 플레처에 맞서는 도전, 아니면 제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그것도 아니면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는 도전. 실은 이 세 가지가 별개의 이야기인 것도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부수고 경지에 도달하면서 플레처를 극복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가 어떤 도전 영화냐고 물으면, 난 광기에의 도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앤드류가 제 목표, 제 욕구의 본질을 흐리고 저를 잠식하는 광기와 맞서는 도전. 그리고 그 힘은 공백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