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현재, 각종 OTT 플랫폼과 제작사들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다. 최근 공개되어 화제를 몰고 있는 작품들만 잠깐 들여다봐도 그 장르와 형태가 무척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태종이 아닌 그의 왕비 원경왕후에 초점을 맞춘 역사물 <원경>, 웹툰 원작, 화제의 여성 학원물 <선의의 경쟁>,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매력의 전문직물 <중증외상센터>, 보고 있기만 해도 힐링되는 로맨스 <멜로 무비>, <나의 완벽한 비서>.
여기에서 함께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작품에 따라 공개 방식이나 제작 회차 수 또한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의 <중증외상센터>는 두 번에 나누어 4회씩 공개하는 형식을 띄었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전형적인 금토 드라마 형태를 띄었지만, 12부작으로 회차 수를 조절했다. 작품의 몰입도와 완성도, 시청자의 흥미를 위해 선택한 것이다. 시청자들은 점점 이러한 불규칙적인 드라마의 형태와 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나름 드라마의 변화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에게 묻고 싶다.
“단막극” 이란 장르를 아시나요?
‘단막극’은 최소 한 회차에서 두 회차, 길면 4회차 안에 끝을 맺는 극을 뜻한다. 8-16부작 내의 긴 호흡이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느낌의 방식이기도 하다. 시작하면 끝나 있고. 좋다 생각하면 다음 이야기가 없다. 똥 싸다가 끊긴 느낌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단막극 형식으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인 작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거나, 확실한 메시지를 짧고 굵게 전달하기 위해서거나, 이야기의 볼륨이 작은 편이라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필요가 있을 때이다. 그렇다면 그런 짧은 이야기의 장점은 무엇일까. 장점이 있긴 한 걸까.
자칭 ‘단막극 마니아’인 내가 생각하는 입문 추천작 두 작품과 함께, 단막극의 장점을 소개해 보려 한다.
tvn 오프닝 시리즈 <고물상 미란이>
최근 방영했던 단막극 중 가장 ‘사람’ 이라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극이라고 생각한다.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여자 미란이. 그녀는 강하고, 억척같고,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성격을 가졌다. 그런 그녀의 앞에 자꾸만 소주병을 한 두 개씩 들고 오는 남자, 진구가 나타난다. 미란의 곁을 맴돌며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풀어 놓는 진구다. 함께 버려진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 주게 된 두 사람이, 서로가 가지고 있던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로맨스를 담고 있다.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란과 진구의 상처, 마음, 감정선을 세세하게 담기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인지, 이곳의 인물들은 보다 더 솔직하고, 당당하고, 확실하게 행동한다. 시청자들은 미란의 과거사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전에 ‘먼저’ 말해 주기 때문이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보다 직접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극을 보며 더 확실하게 몰입할 수 있다.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이야말로 시청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드라마다.
미란과 진구 두 사람이 얽히게 된 계기는 고물상 앞에 버려진 작은 강아지 하나다. 이런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이야기는, 판타지 요소를 가득 담고 있는 휘황찬란한 드라마들보다는 훨씬 더 ‘사람 냄새’ 가 나게 해 주는 효과를 준다. 사람과 사람. 두 사람 사이의 감정. 집중해야 할 것들에만 집중하게 해 주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짧고 굵게 치고 빠지는 단막극 장르만이 줄 수 있는 섬세한 집중력이다.
tvn 드라마 스테이지 2021 <산부인과로 가는 길>
앞에서 설명한 대로, 단막극은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일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장르를 깊게 파고 들어 가는 경우는 희귀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참신한 시도와 새로운 형식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어떻게 한 시간 안에 좀비물을 그려낼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좀비물’ 장르의 극이다.
극의 주인공인 화영은 막 출산을 앞둔 임산부다. 아이는 나오기 직전이라 산부인과에 가야만 하는 신세인데, 하필 그때, 나라에 ‘좀비 사태’가 터진다. 일반적인 좀비가 아니다. 아주 느린, 느릿느릿한 좀비들이다. 좀비들은 사람이 뛰는 것보다 느리게 걷고, 능력도 우리가 아는 무시무시한 좀비들보다는 조금 떨어진다.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같은 세계관을 겪고 있다면 뭐야, 시시한데?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영은 다르다. 그녀는 좀비보다 더 느린, ‘임산부’ 이기 때문이다.
좀비물 장르를 덧씌워 재미와 웃음을 챙긴 이 드라마는 사실 ‘빠른 세상 속, 느린 사람들’ 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영이 산부인과로 가는 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요구르트 카트를 끌고 다니는 아줌마, 군대의 관심 병사, 노인... 사회 속,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느린 사람들이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화영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생명을 위해서 죽음을 감수하고 산부인과까지 길을 걷는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느려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화영의 모습에 집중했다. 결국은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를 듣는 것에 성공한 그녀의 모습이 계속 걸어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개연성과 세계관 등을 따졌을 때 최고의 스토리는 아니다. 한 시간 안에 ‘느린 좀비’ 와 ‘화영의 서사’ 모두를 보여주기는 부족한 법이고, 코미디일지 엉성한 짜임일지 모를 연출들이 때때로 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의미가 있는 것은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빠른 세상에서 느린 사람들이란 누구인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는지, 우리가 느려질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차게 60분 한 편의 드라마에 담아 생각하고 이야기할 것들을 던져 준다. 단막극의 진정한 장점이란, 짧고 굵게 치고 나가면서도 많은 질문을 머릿속에 남겨 준다는 것이다. <고물상 미란이>와 <산부인과로 가는 길> 두 작품 모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