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가난, 기침, 사랑. 내성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청년 베르테르는 발하임 광장에서 ‘자석산의 전설’ 인형극을 하는 롯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자석산에 끌려가 산산이 부서지는 배, 강렬하지만 섬뜩한 전설처럼 베르테르는 롯데에게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간다. 베르테르는 인형극을 하는 롯데의 모습을 그린다. 쏟아지는 비에, 롯데를 향한 마음에 온몸이 젖는 줄도 모르는 그에게 롯데는 우산을 씌워주며 햇살처럼 웃는다.
텅 빈 가난한 마음에 롯데가 빛처럼 스며드는 순간, 베르테르는 사랑이란 불치병에 감염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낫는 법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그 병은 롯데에게도 옮는다. 이성과 규칙으로 롯데를 보호하는 남편이자 법관 알베르트는 아내가 흔들리는 것을 알지만 그녀 앞에선 침묵한다. 베르테르에게 ‘왜 저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지’ 물으며 ‘다만 지나치지 않게’ 곁에 있어 달란 롯데의 눈물 섞인 간청에 베르테르는 자석산에 부딪히는 배처럼 산산조각이 난다.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의 전설 <베르테르> 25주년 공연이 2025년 1월 17일부터 서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순항 중이다. 3월 16일에 서울에서 막을 내리는 공연은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드림씨어터, 4월 5일부터 6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도 관객들을 만난다. <베르테르> 25주년은 베르테르 역에 엄기준, 양요섭, 김민석, 롯데 역엔 전미도, 이지혜, 류인아, 알베르트 역은 박재윤과 임정모, 오르카 역엔 류수화와 이영미, 카인즈 역은 김이담과 이봉준이 맡아 열연 중이다.
2013년부터 해바라기를 상징적인 꽃으로, 극 중 배경 발하임 마을을 화훼산업단지로 설정한 극은 25주년인 현재도 같은 컨셉을 유지 중이다. <베르테르>가 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무대와 장면 연출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사랑을 끝내는 베르테르의 마지막. 그는 롯데가 준 노란 리본을 알베르트가 내어준 권총에 묶는다. 그가 선 곳은 무대 위쪽이다. 무대 아래의 롯데는 베르테르를 상징하는 해바라기밭을 거닐며 눈물짓는다. 그의 죽음을 직감한 롯데의 얼굴엔 슬픔이 드리우지만 베르테르는 객석을 등지고 있다. 의도적으로 배제한 총소리 대신 날카로운 현악기 소리가 죽음의 순간을 채운다.
뜨거운 햇빛에 몸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태양을 바라보던 해바라기들은 힘을 잃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일제히 무대에 쓰러진다. 이 장면은 베르테르의 죽음을 암시한다. 또한 ‘금기’라는 장벽을 넘지 못한 세상 모든 비극적인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유 가득한 엔딩 장면은 <베르테르> 무대 연출의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다.
<베르테르>가 롱런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서정적이고 클래식한 선율의 관현악 오케스트라 음악은 낭만과 사랑을, 때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격정과 불안을 선사한다. 같은 곡을 전혀 다른 상황에 사용, 혹은 분위기나 편곡을 달리하여 극의 변화를 표현하는 리프라이즈 또한 잘 활용했다. 1막 초반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의 심정을 표현한 <어쩌나 이 마음>. 롯데가 알베르트와 결혼을 앞둔 걸 알고 발하임을 떠나며 부르는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같은 선율이지만 편곡과 분위기를 달리하여 1막 초반엔 설렘을, 1막 엔딩 땐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2막 엔딩에서 베르테르가 목숨을 끊기 전 부르는 최후의 넘버이기도 하다. 그가 ‘발길’을 뗄 수 없는 곳은 1막 엔딩 땐 롯데가 사는 발하임 마을을 뜻하지만, 2막에선 생 그 자체를 말한다. 사랑에 빠질 땐 해맑게 느껴졌던 롯데의 미소가, 절망으로 끌려들어 갈 땐 그 미소 때문에 마음이 납처럼 가라앉는단 가사 또한 의미심장하다.
<베르테르>가 25년간 사랑받는 마지막 이유는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는 고유의 정서이다. 베르테르가 자신을 사랑한단 걸 알아버린 롯데는 이미 알베르트의 아내이다. 롯데는 다신 찾아오지 않겠다는 베르테르에게 ‘예전 그대로 만나주세요, 다만 지나치지 않게’라며 모순된 간청을 한다. 문학적 감수성을 공유하던 친구로, 예전처럼 무해한 존재로 남아 달란 뜻일 것이다. 하지만 롯데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베르테르는 예전 그대로 만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이다.
새빨갛게 만개한 금단의 꽃, 롯데 내면을 상징하는 꽃은 알베르트의 온실 안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2막 후반엔 롯데가 금단의 꽃을 스스로 온실에 넣는 장면이 추가돼 그녀의 선택을 보여준다. 이성과 감성,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요동치던 롯데는 현실과 도덕을 택한 것이다.
알베르트와 롯데가 결혼할 걸 몰랐던 1막엔 그렇다 쳐도, 결혼 후에도 롯데 옆에 머물며 그녀를 흔드는 베르테르를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도덕적 비난을 받을 선 근처를 맴도는 것도 사실이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베르테르와 롯데 모두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관객을 양가감정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무모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아닌 걸 알면서도 흔들려봤다면 그들의 마음에 조금은 공감하지 않을까.
안정적인 사랑을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불안했던 경험이 있다면 알베르트의 가면이 벗겨지는 과정을 보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베르테르, 롯데와는 달리 알베르트는 정제되고 단단한 내면을 가진 어른이다. 하지만 약혼녀 롯데가 새로 만난 친구, 베르테르 이야기를 편지에 늘어놓을 때부터 불안했을 것이다. 편지로만 베르테르에 대해 듣던 알베르트는 보자마자 알아챈다. 그의 마음속에 롯데가 있다는걸. 다 알지만 이해하려 하던 그는 정원사 카인즈를 처분하는 문제로 베르테르와 대립한다. 여주인을 사랑하는 카인즈는 베르테르와 거울처럼 닮은 인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하며 파국으로 뛰어든다. 베르테르는 카인즈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간청한다.
하지만 법과 규칙, 사회 질서를 지키는 알베르트는 카인즈의 살인죄에 맞는 사형을 판결한다. 마치 롯데를 마음에 품은 베르테르를 처벌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조차 제어하지 못해 감정의 민낯을 드러내는 베르테르, 롯데와 반대로 알베르트는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상황을 통제한다. 그는 우체부를 통해 베르테르에게 권총을 빌려주며 자살을 돕는다. 롯데와 알베르트는 결코 베르테르를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의 마음엔 불안과 고통이 뿌리박혀 버렸으니까.
<베르테르> 25주년엔 베르테르를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아가는 몇몇 장면이 추가됐다. 발하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이자 이방인 베르테르를 따뜻하게 대해주던 술집 주인 오르카는 카인즈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 후 베르테르에게 떠나라 권한다. 그 장면에 흐르는 앙상블들의 ‘죽음의 냄새가 나’ 합창 또한 지난 시즌엔 없던 연출이다.
앞에선 롯데의 ‘자석산의 전설’ 인형극에 호응하지만, 뒤에선 왜 그녀가 자석산 얘기만 하는지 수군대는 주민들의 대화도, 금단의 꽃을 스스로 온실에 넣는 롯데 또한 25주년에 추가돼 금지된 사랑의 비극성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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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이 정해진 비극에 끌려간 어리석은 베르테르. 하지만 모든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외로움이란 시각에서 그를 보면 연민할 수밖에 없다. 발하임 주민이 아닌 이방인이었기에 롯데에게 알베르트가 있는 것도 몰랐다.(유쾌한 술집 주인이지만 인생 내공 깊은 오르카는 베르테르가 롯데를 좋아하는 걸 바로 알았지만 일부러 말 안 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녀가 롯데에겐 약혼자가 있다고 일찍 말해줬으면 그들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극에선 거처 없이 떠도는 베르테르였기에 더 고독하고 어두웠을 것이고, 자신의 그늘을 밝혀주는 햇살 같은 롯데에게 반한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베르테르는 죽음으로 고독에서 도피했지만, 롯데와 알베르트 또한 서로를,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결말에 다다르며 고독이란 비극에 빠져 버린다.
롯데 말처럼 저 사람이 ‘왜 저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지’, 베르테르의 마음처럼 내가 왜 저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 수도 없고,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의 이유 없음은 축복이기도 하고, 때론 저주이기도 하다. <베르테르>는 그 저주와 비극을 그려낸 극이다. 가슴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면, 머리론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