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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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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영화 <아키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아키라>가 약 33년만에 재개봉했다. 줄거리는 제3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된 폭격과 이후 그 여파로 쑥대밭이 된 도쿄 위에 세워진 네오도쿄에서 화려한 문명의 발전 뒤에 가려진 폭력과 도시의 어두운 이면을 비추며 '아키라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비밀에 근접해가는 내용이다. 아키라의 정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의 중추에는 '하시리야'라는 이름의 폭주족 리더 '카네다'와 그와 보육원에서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친구 '테츠오', 아키라 프로젝트의 실험체들, 그리고 반정부 게릴라가 있다. 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현대의 뭇 애니메이션보다 사실적이고 부드러운 모션, 화려한 작화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버블 시기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불안하고도 우울한 정서가 짙게 깔린 연출이 일품인 작품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영화관에서 제대로 본 "아키라"는 발전이라는 이름의 욕망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아키라> 속 시대배경은 2019년으로 지금보다 약 6년 전이자 당시에 상상한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20년을 경험해본 우리에게는 상당한 이질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이미 도착한 고요한 재앙과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세계가 예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성 없는 발전은 곧 종말을 부르는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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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는 발전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의 종착지에 종말이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이 메시지는 전혀 낯선 무언가가 아니다. 여기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네오도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깊은 애도와 전염병을 향한 공포에 빠진 시기인 2020년이 머릿속에서 교차되는 순간, <아키라>의 메시지는 피부로 다가온다. 영화 속 네오도쿄는 첨단기술이 지배하고 있지만, 눈부신 발전의 수혜를 모두가 받지는 못한다. 이러한 불만이 기저에 깔린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하느라 도시는 정신이 없고 치안 또한 좋지 않다.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정부는 일부 시민들을 외부의 눈에 띄지 않도록 급히 '청소'하듯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이미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덮는 이러한 처사는 네오도쿄가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쪽에서는 도쿄 올림픽 개최를 축하하고 있지만, 관객은 도입부부터 이 올림픽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강력한 예감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언제나 경계하고 있었던 재앙을 일반 시민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의 팬데믹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면 이 욕망의 정체는, 아키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키라의 정체는 욕망의 객체이자 욕망 그 자체다. 아키라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하는 테츠오의 행동이 곧 이러한 정체를 입증한다. 테츠오는 자신의 열등감이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진단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아키라를 욕망한다. 아키라의 실체는 제3차 세계대전에 불씨를 지핀 폭발의 원인이자 거대한 에너지로 그 사실을 정부는 은폐해왔다. 아키라의 힘을 운용하는 강력한 병기를 향한 야망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 31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큰 진척이 없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어 깊은 곳에 엄중한 경계를 치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둔 것이 전부이며 테츠오를 포함한 모든 실험체는 아키라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테츠오가 오래도록 품고 있던 카네다를 향한 열등감을 누르지 못하면서 결국 아키라에 손을 댄 순간, 아키라의 숙주가 된 테츠오와 테츠오까지 집어삼킨 아키라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테츠오가 통제하지 못했던 감정과 인정 욕구는 그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테츠오 안에서 묵을 대로 묵은 아키라였다. 테츠오는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혔다. 욕망은 욕망을 불러오고, 종국에 인간은욕망을 욕망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달려온 길의 끝에는 종말이 있을 뿐이라고 <아키라>는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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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가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되는 잘못된 결정과 그로 인한 피해를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키라>에는 핵폭발과 제3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무기 개발을 직접 비판하기 위한 메타포와 소재가 계속 등장한다. 그를 통해 전쟁과 같이 막을 수 있었던 재앙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국가의 욕망은 쉽게 몇몇 개인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다. 사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한 국민들이 정부에 제대로 보상받은 사례는 손에 꼽는다. 작품에서는 테츠오가 아무런 힘이 없는 카네다와 충돌하면서 개인을 통제하지 못한 실수가 두드러져 보이기도 하지만, 아키라 프로젝트의 의미, 인체실험이라는 수단, 미지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 등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회귀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직면하지 않는 정부의 무능이 이미 도쿄의 두 번째 붕괴를 가리키고 있었다. 반정부 게릴라들이 지닌 불만은 영화 속에서는 아키라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를 축으로 돌아가는, 비이성적인 분노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된다. 이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은 사람을 대체 가능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보는 시선과 처우를 직접 느끼면서 비롯된 것일 테다.

 

정부 관계자들은 아키라 프로젝트가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자 프로젝트를 애물단지로 본다. 아키라의 위험성을 몸소 느낀 이는 언제 또 발생할지 모르는 재앙을 막는 것이 곧 아키라 프로젝트의 마지막 남은 소명임을 인지하고 있으며 명령에 거부하는 용기까지 내지 못하고서는 이러한 소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때로는 중요한 사안들을 개개인의 우선순위에 맞게 편집하느라 정말 중요한 사안들을 간과하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부는 아키라가 불러온 재앙을 감당할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저 기술을 발전시키기를 종용했고 그 안의 인간은 보지 않았다. 변덕스럽게 바뀌는 욕망의 형태에 따라 마음대로 세상을 주물러 보려는 오만은 결국 한낱 인간일 뿐인 그네들에게도 돌아간다. 윤리 의식과 반성의 태도가 밑바탕이 되지 않은 발전의 대가는 이토록 쓰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개발한 후, 세계의 반대편을 언제든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강대국들이 지니게 되며 전세계가 핵전쟁의 공포 속 무기 개발에 매진하는 현실은 <아키라> 속 세계와 흡사하다. 전쟁을 한 발에 끝내고 싶다는 욕망이 후대의 평화를 무너뜨렸고 모든 국가가 핵무기를 없애는 방안보다는 유지함으로써 억지력을 발휘하는 효과에 집중하고 있다. 씁쓸하지만 현실은 본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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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오의 머릿속에는 두통을 동반해 "아키라!"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테츠오에게 아키라가 자신을 찾아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테츠오는 실험의 부작용으로 보이는 이러한 두통과 이명이 심해질수록 큰 힘을 각성하게 된다.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자신의 힘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힘을 갈구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아키라의 이런 부름이 들리는 현대에 살아가고 있다. 발전한 미래를 언제나 우리는 꿈꾸고 있는 것처럼 광고와 과학은 말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발전이 맞는지 비판 의식을 지녀야 한다. <아키라>를 비롯한 SF 세계관에서 인류는 윤택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 발전을 위한 발전으로 이룩된 미래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눈부신 미래를 누릴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안락한 삶 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불편한 부분에 익숙해지고, 때로는 우리의 안락한 삶이 누구의 삶을 짓밟고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불편한 삶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발전의 목적과 의미를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내 안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들어주겠다고 손짓하는 아키라의 망령을, 비로소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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