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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아침, 부모님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본 기억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대목에 들어선 목욕탕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카운터 옆 의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붉어진 얼굴로 노곤해진 채 시계를 쳐다보았다. 탈의실에서 준비를 마치고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대한 욕탕에서는 김이 뭉게뭉게 뿜어져 나왔다. 어릴 적, 혼자 씻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유년기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맨몸을 공유한다는 것이 조금 창피하게 느껴졌다. 약간의 머뭇거림에도 잠시, 탕에 들어서면 긴장감은 사라졌다. 굳어있던 몸은 스르르 풀리고 따뜻한 기운이 뼛속으로 스며들며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 느낌이 좋아서 이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목욕탕에 방문했었다. 뜨거운 물을 잘 견디지 못했던 나는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며 즐기곤 했는데, 어느 날은 정신이 점차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핼쑥해진 얼굴로 탈의실의 정자에 대자로 뻗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나의 목욕탕에 대한 마지막 방문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은 잠시 접어두고, 대중목욕탕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정겨운 분위기가 그려진다. 세대가 변해도 목욕탕이라는 이름만큼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영원 불변적인 느낌도 들기도 한다. 실제로 목욕탕이 우리나라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0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목욕탕은 꽤 흥미로운 장소이다. 맨몸으로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어린이들이 마음껏 첨벙대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은 진정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매체에서 목욕탕에 대해 주목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일권 작가의 웹툰 ‘목욕의 신’이나, 마일로 작가의 웹툰 ‘여탕 보고서’, 정혜덕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목욕탕’ 등등. 목욕탕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목욕탕에 대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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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도감」은 작가 엔야 호나미가 글과 그림으로 설명하는 도쿄 근방의 대중목욕탕 가이드북이다. 총 24곳의 목욕탕 내부를 부감하듯이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 과거 건축가였던 작가의 전공을 살려 아이소메트릭(Isometric)이라는 건축 도법으로 일러스트를 그렸다. 작가는 목욕탕의 전경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 시설의 전반적인 부분을 측정하고 기록한다. 1차적인 파악이 끝났다면, 그다음은 작가가 직접 탕 안으로 들어갈 차례이다. 해당 목욕탕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특징이나, 다가오는 느낌과 감정, 시각적으로 보이는 장식과 풍경 등을 몸소 체험하며 그곳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일러스트의 뒷 장에는 해당 목욕탕의 특징과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가 적혀있다. 얼핏 보면 다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장소만의 독특한 이용 방식이 존재한다. 공통된 것은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을 간신히 끌고 나온 다음, 시원한 음료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목욕탕마다 베스트 코스는 모두 달라서 대합실에서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카운터에서 따라주는 생맥주를 벌컥 들이키기도 하며 가끔은 식사 한 끼를 권하는 곳도 있다. 몰랐다면 그저 스쳐 지나갈 포인트를 200%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작가에게서 세심함이 돋보인다.


이 책의 별미는 독자의 상상 속에 존재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타국의 목욕탕을 글과 그림으로 상상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다. 탈의실에서부터 샤워실, 욕탕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거닐어 본다. 일러스트 속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는 인물에 자아를 투영해 보고, 세부적인 요소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수십 개의 목욕탕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비교해 본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목욕탕을 선택해 구글 지도에 넣어서 언젠가는 한 번 목욕탕 여정을 떠나야지, 하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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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목욕탕도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뜨거운 물에서 피로를 풀고 싶다는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직 녹지 않은 길거리의 눈을 바라보다 문득 목욕탕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의욕이 사라지기 전 얼른 바구니를 챙기고 동네의 목욕탕으로 향했다. 어느덧 목욕탕에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며 말이다. 입구로 들어서자 어릴 적 기억 속의 목욕탕과 거의 유사한 구조가 눈에 띄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곳만큼은 변하지 않겠구나, 라는 이유 모를 안도감도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에 서투른 몸짓으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탕에 발끝부터 담가본다. 온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며 닭살이 오소소 돋는 것이 느껴진다. 욕탕을 가득 채운 수증기와 각종 한약재가 뒤섞인 나무 향,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탕은 그야말로 무릉도원 같았다. 눈을 감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자 나를 뒤덮던 잡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의 내가 행복한데…. 라는 일념만이 가슴에 채워졌다.


목욕탕 도감의 저자인 엔야 호나미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사 사무소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도한 업무로 번아웃이 찾아오고,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직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상태가 악화되던 중 그녀는 의사와 친구의 추천으로 목욕탕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이후 목욕탕에서 얻은 행복감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는 목적이 생겨 SNS에 목욕탕 그림을 올린다.


건강을 회복한 엔야 호나미는 다시 건축사 사무소에 복직했지만 휴직 전처럼 일할 수 없었다. 때마침 협업을 진행했던 대중목욕탕 고스기유(小杉湯)로부터 이직 제안이 들어오고, 작가는 좋아하는 일과 현실적인 위치 사이에서 고민한다.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깊어져만 가는 마음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모두들 그녀의 이직을 응원하며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작가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가 목욕탕 도감을 통해 해나가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배워온 건축 일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을 목욕탕이라는 장소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용기가 생겨나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목욕탕 도감」 p.123

 

 

이후 고스기유로 출근하게 된 작가는 반년 동안 도쿄 근방의 목욕탕을 취재하고 일러스트로 소화해 내기 위해 두 발 벗고 나선다. 고되고 힘든 일상이었음에도 그녀는 그림 그리는 인생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일러스트를 엮은 책 <목욕탕 도감>이 출판된다. 현재 엔야 호나미는 대중목욕탕 고스기유에서 지배인으로서 카운터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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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X 계정 @kosugiyu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 때가 많다. 주머니 속의 핫팩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추위도 있다. 외투를 꽁꽁 여미고 목도리로 애써 추위를 막아보던 일상에서 한 번쯤은 주변의 목욕탕을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새롭게 생긴 일과의 변수에서 미처 몰랐던 행복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어 손발을 얼리던 수족 냉증을 잠깐이나마 멈출 것이다. 나 또한 엔야 호나미로부터 목욕탕의 기쁨을 알게 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소한 즐거움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컬쳐리스트 조유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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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훈제오리
생각해보니 목욕탕을 방문 한지도 오래되었네요. 글을 읽다 '온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며 닭살이 오소소 돋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서 아 맞다!! 하고 잊고 있던 닭살이 올라왔어요 ㅎㅎㅎㅎ 저자가 목욕탕을 가게 된 이유에서 끄덕거리기도 하며.. 좋은 책 알아갑니다. 잘 봤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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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3 16:51: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