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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한때 황색언론을 주도하며 언론의 본질을 흐린다는 비판을 받곤 했던 ‘조셉 퓰리처’. 결국 경쟁에서 패배한 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그는 실명까지 하게 되며, 신문왕이라 불리던 사내로선 다소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하게 된다. 말년에 스스로의 과오를 참회하게 된 조셉은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언론인 양성을 위한 후원 활동을 펼치는 등 타계하기 전까지 언론계를 위한 여러 활동을 이어간다.

 

그렇게 1917년 끝내 영면에 들게 된 조셉이 남긴 유언에 따라 50만 달러의 기금을 바탕으로 해마다 참된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제정된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퓰리처상은 보도 및 예술 분야에 걸쳐 시상되며, 이중 특히 보도 부문의 경우에는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며 언론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예로 손꼽히고 있다.

 

 

[공식포스터] 퓰리처상 사진전.jpg

 

 

이같이 보도 부문에 있어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사진 작품들이 올겨울 다시 한번 서울 땅을 찾았다. 사상 네 번째인 이번 퓰리처상 사진전 서울 전시는 2025년 3월 3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진행된다.

 

 

 

IMAGINE


 

전시장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관람객들 앞에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과거가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 그 아래로 펼쳐진 사진전의 기획의도는, 영원으로 박제된 찰나의 순간들이 담고 있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성찰토록 한다.

 

 

지구는 커다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세상은 변화를 겪는다. 매일의 역사를 목격한 사진가들이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린 뜨거운 한 장면은 퓰리처상의 심장에 새겨진다. 우리는 그 사진 앞에 서서, 사진이 던지는 물음을 마주한다. 

 

- 퓰리처상 사진전 中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한순간들을 마치 그 현장에 있는 양 실감 나게 상상해 보라는 듯, 본격적인 전시를 앞두고 입구에서는 존 레넌의 이 테마곡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상상하다’라는 뜻의 제목을 지닌 이 곡의 가사는 당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로 쓰였으며, 평화와 인류애를 상징하는 음악이 되어 현재까지도 사회적인 행사에 자주 동원되곤 한다.

 

영어 해석이 서툴던 어린 시절에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드문드문 아는 몇 단어를 재료로, 제목 그대로 제 나름의 상상을 마음껏 펼쳐보곤 했다. 머리가 제법 굵어지면서는 ‘몽상가’라는 단어에 담긴 철학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색채를 곱씹게 된 것 같다.

 

이러한 개인의 소소한 역사처럼 단순히 사진 속의 그 현장을 상상하던 나는 전시 중반에 이르러서는 과연 ‘역사는 진보하는가’와 같은 회의적인 생각에 잠시 멈춰 서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입구 바로 옆 출구로 나올 즘에는 벽을 타고 설핏 들려오는 가사처럼 나 역시 기꺼이 몽상가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언제나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이기에, 박제된 순간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결코 무의미할 수는 없는 듯싶다. 그러니 세계사의 긴요했던 한순간을 현장 그대로 담는다는 건, 일상화된 사진 기술에 새삼스런 경탄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그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사투한 사진 기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게 한다.

 

S#1. the Past: 타임머신과 관련한 오랜 고민이 있다. 만약 내게 타임머신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과거와 미래 중 과연 어느 시점으로 가야 하냐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미래가 궁금했던 것 같다. 확신할 수 없는 세상만이 미지의 세계라고 믿었던 것이다. 상상에도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과거로 가보는 것 역시 상당히 흥미롭겠다는 생각에 닿게 됐다.

 

 

"정지된 순간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시간이 정지된 그 순간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죠." 

 

_ 캐롤 구지

 

 

엄숙한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이제 막 전시를 관람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상상하는 과정이 마치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를 여행하는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사진마다 상세히 첨부된 해설들이 풍부한 상상을 돕고 있었다.

 

실제 존재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 일은 아니라는 듯 관망하던 태도가 부끄러워졌던 건 우리의 뼈아픈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로 그 사진 앞에서였다. 한겨울 전쟁통에 폭파된 다리를 건너는 피란민 대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아슬아슬하게 철탑 위에 매달린 그 모습을 마주 보며, 가상이 아닌 실존하는 과거를 상상하는 것에 담긴 무게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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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은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있었던 비극이 그저 남의 일이 될 수만은 없다는 걸, 누군가의 절실했던 삶의 의지를 통해 꾸짖고 있었다.

 

S#2. the Present: 어느 순간 가슴 한 켠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기시감이 부채감이란 형태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보다 먼 과거에서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한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일이 어려워진 것이다.

 

흑백이 컬러가 되고, 사진 속 인물의 옷이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닮아가고 있었지만, 주인공만 바뀐 사진들은 여전히 전쟁과 테러, 기근과 참사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역사는 그저 반복될 뿐인 듯,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없는 것 마냥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름만 다른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빛과 어둠이 엉킨 찰나의 진실은 기억의 퇴색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중략) 그들의 눈빛은 우리와 맞닿아 있고, 그들의 절망은 이 세상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퓰리처상 사진전 中


 

무엇보다 유독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많다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연약한 생은 희생자들의 무고함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폭력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명분도 온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시사하는 듯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념과 사상을 알 길 없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무참히 희생당하고 있다.

 

 

생명을 불어 넣다 - Photograph courtesy Ron Olshwanger.jpg

ⓒ Photograph courtesy Ron Olshwanger

 

 

과거를 상상하던 나는 어느 순간 잊고 있던 현실을 떠올리며 괴로워졌다. 결국은 현실의 안락함에 기대 망각이라는 편의를 취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어떤 무고한 희생도, 참담한 비극도, 내 현실이 아닌 이상 쉽게 무뎌지고 끝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어떤 진실은 그 무게가 무거울수록 외면이 더 편해지는 법이었다.

 

S#3. the Future: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몽상가가 되기를 자처하는 나는 역경과 희망을 두루 담고 있는 이 부사를 좋아한다. 결국은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끝내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무기는 단지 파괴할 뿐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찍는 사진가의 카메라는 사랑, 희망, 열정을 담아 삶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끈다. 그 모든 일은 1/500초로 충분하다.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 퓰리처상 사진전 中

 

 

동행객들과 담소를 나누며 입장할 때와는 달리 전시장을 빠져나오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대화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출구와 붙어있는 입구 쪽에서 입장 당시 들었던 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사진이 던지는 물음에 어떠한 답을 떠올렸을까? 저마다의 감상은 다르겠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발걸음으로 나서는 뒷모습들이 전시의 감동을 이야기하는 듯싶었다.

 

 

고민을 함께 하는 두 사람 - Alamy Stock Photo.jpg

ⓒ Alamy Stock Photo

 


과거가 우리를 구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영원으로 남은 과거의 순간들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우리의 참된 양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희망은 과거를 외면하지 않을 현실의 용기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EHIND THE PULIT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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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은 것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제 일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_ 호스트 파스


 

평소 기념품을 많이 구매하는 편은 아닌데도, 관람이 끝난 후 맞은편에 있는 기념품 숍에서 티켓값을 넘어서는 금액을 사용하고 나왔다. 그중 라는 책을 구매해 전시 이후의 여운을 함께 즐겼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일.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위태로운 현장에 기꺼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 그 불굴의 의지의 출처가 관람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언론상을 수상한 것이 무색하게도 수상자들 대부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중 상당수가 전쟁지의 사진으로 수상을 하고 또 다른 전쟁지에서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언론인으로서의 명예란 사명(使命)을 넘어서 사명(死命)에 더 가까운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노래가 있죠. 

누구도 노래하지 않을 나의 영웅들. 

우리, 저널리스트들이 

그들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누가 해야할까요?"

 

_ 존 화이트

 

 

한때 나는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꿨다. 꿈이 여전히 현실과는 멀게 보이던 당시의 일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의와 사투하는 모습이 영웅처럼 멋지게만 보였다. 정작 그 꿈을 포기하게 됐던 건 내 스스로가 엄청난 겁쟁이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숨을 걸고 현장에 뛰어들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매일 누군가의 비극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도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현실을 기록하는 대신 상상의 시공간을 떠올리기로 한 건 어떤 면에선 다소 비겁한 도망이기도 했다.

 

사활을 걸고 진실을 기록하는 언론인들의 땀과 눈물에 경의를 표한다. 비록 그만큼의 용기는 없지만 적어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최소한의 양심이 내게 있기를.

 

퓰리처상 사진전과 함께 과거를 상상하며,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이 저를 몽상가라 부를지도 몰라요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저는 혼자가 아니랍니다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언젠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요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그렇다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_ 존 레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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