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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금요일 저녁 대학로에 도착했다. 일주일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자 발걸음이 가볍다. 금요일마다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더 챙겨마시고 늦은 시간까지 서울 어딘가에서 배회하는 건 요즘 들어 새로 생긴 나만의 작은 습관이자 일탈이다.


요즘은 주로 연극을 본다. 뮤지컬이나 콘서트에 비해서 다소 정적이고 진입장벽이 있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는데 한 주를 그냥 보내주기 아쉬워 보기 시작한 연극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날이 뜨겁거나 서늘했던 지난 계절에는 페스티벌의 매력에 빠져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돗자리를 깔았었는데, 겨울이라 따뜻한 실내가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추위 혹은 한주간의 고된 삶을 피해 나지막한 독백과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대학로 어느 극장에 앉아있으면 연극 배우들은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손 뻗으면 닿을 듯하고 말을 건네면 들릴듯한 거리에서 연기를 펼치던 그들은 이내 사라지고 이야기와 등장 인물만 남는다.


나는 그들의 인도에 따라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돌연 서사의 세계의 휘말린다. 가까웠던 무대와의 거리만큼이나 이야기와 나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내 삶의 축소판인지 저기 저 인물은 나 혹은 주변에서 보았던 누군가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연극에 빠지게 된 건 극의 서사들이 내 삶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겪는 삶의 여정과 구석에 몰린 기분까지도 내가 함께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 극이 한참이나 지나고나서야 겨우 틈새로 비치는 희망도 역시 내 것이라 주장해도 되는걸까. 연극에서 느꼈던 것들을 전부 품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며 연극 후기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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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저수지의 인어’는 2024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극단 ‘달팽이주파수’의 작품으로 2월 7일부터 오는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아를 따라 사는 삶에 제약이 되는 현실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솔직한 내면의 욕망, 그리고 그 끊임없는 추구 과정을 통해 성사되는 가능성에 대해 다루는 작품이다. 나 자신과 가족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며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의 여정과 고립에서의 탈피 과정을 다룬 서사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에는 크게 3가지의 서사적 공간이 나타난다. 주인공 철수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 작가가 꿈인 철수가 쓰는 이야기 속 현실의 그들과 대응되는 인어 부자가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철수가 온라인으로 습작 피드백과 대화를 주고받는 영희와의 공간. 각각의 세 공간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삶은 마치 환경오염과 인어 사냥으로 상처입고 바다를 떠나온 인어의 삶과 같다. 아버지는 세상에 상처받고 방구석에 틀어앉아 버렸고 살찌고 거대한 몸으로 하루종일 소파에 앉아 라면이나 먹는게 삶의 전부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세상 소식을 가만히 수집하다 아들이 돌아오면 간간히 대화를 나눌 뿐이다.


철수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고 저수지에서 알바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희와 온라인으로 습작을 주고받으며 꿈을 추구한다.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쓰라는 것도 영희가 준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날 영희는 현실의 버거움에 못 이겨 세상을 떠난다.


철수의 작품 속 인어들은 인간 사회에 숨어 겨우겨우 살아간다. 하지만 인어가 언제까지 바다를 등지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아들은 자꾸만 바다를 향해 돌아가고 싶어하고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며 막는다. 그들은 바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철수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며 끝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버지는 오랜 고립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글쎄, 그 여정의 끝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어는 바다로 돌아가다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고, 철수는 작가 데뷔에 실패하고 아버지는 결국 영영 방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분간의 연극을 따라가다보면 한 문장이 남는다. 하루종일 티비만 쳐다보던 아버지가 아들의 작품을 말 없이 오래오래 읽어보곤, 문을 열고 밖으로 떠나는 아들을 향해 건네는 말이다.


“실컷 해, 희망이 보이면 틈새라도 들여다 봐.”

 

그리곤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말한다. 돌아올때 전화하라고. 비가 오니 데리러 가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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