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그리스도교(자세히는 개신교)를 믿는 그런 집안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카테고리는 일생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우리 집에 종교적 분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과거에 나에게 있었던 상황을 듣게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8살이었을때 외할머니에게 화투를 두는 법을 배운 뒤 외할머니와 소액을 걸고 소위 돈따먹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외증조할머니께서 "그런 건 사탄들이나 하는 짓이야!" 하면서 호되게 혼을 내셨고, 그림 맞추기가 그저 즐거웠던 나에게 외증조할머니는 일련의 '죄책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던 것 같다.(*그런데 여기서 문득 드는 의문: 외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는 모녀 사이셨는데, 왜 외할머니는 화투를 알려주고(긍정하고), 외증조할머니는 부정했던 것일까)
그런데, 필자가 비록 천재적인 사상가들에 비할 것은 못 되지만, '신'에 대한 일련의 부정적 사상 혹은 감각을 가진 철학자들이 지녔던 가정 환경을 필자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신,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각을 필자 역시 강렬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 감각을 현재의 시점에서 복기할 때 가장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꼈던 때는 주일학교 예배시간을 비롯한 QT(그룹 별로 예배가 끝난 후 성경을 읽고 같이 공부하는 시간) 모임 때였다. 참고로 성경은 (그리스도교/기독교 기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고, 그 구분의 기준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할 '예수(Jesus Christ)'의 탄생 이전과 이후이다. 구약에서 가장 첫 번째 다뤄지는 책은 '창세기(Genesis)'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창세기부터 믿을 수 없고, 믿기가 어려웠다. 창세기에서 온갖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 너무나 신인동형적(인간의 사고로 신을 형상화하는 것) 사고 같았기 때문이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 바로 인간 사유의 보편성인가 싶기도 한데- 신의 존재에 관한 무수한 철학적 및 신학적인 토론의 핵심 주제인 바로 '악'의 문제였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말한다. 나아가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세상에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악한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초에 '악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피조물을 만들면 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아담이 혼자서 외로워하니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에서 지은 하와(사실 이러한 창조 구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가 그들이 살고 있는 에덴동산의 '한가운데에' 선악과를 신이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선악과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은 애초에 죄가 없는 존재였으나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과일을 먹게 됨으로서 죄를 짓고 그들은 그곳으로부터 쫓겨나게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선악과를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먹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선악과를 잘 보이는 곳 '한가운데에' 심어놓았다는 신이 나에게는 다소 새디스트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을 때마다 QT 선생님에게 수많은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유빈이는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거란다.'였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 그리스도교의 신을 더더욱이 믿을 수 없고 의구심 가득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던 같다. 생각해보았을 때, 나는 '이해'하는 것이 많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그 이후에야 다음 과정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믿으라니! 그건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였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마치 긍정과도 같다는 말처럼, 신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인 감각과 생각들은 그것에 대해 수많은 질문들을 가지도록 나를 이끌었다. 필자는 철학을 전공했는데, 대학교에 처음 입학할 당시만 해도 신에 대한 존재를 철학적으로 파볼 때까지 파보겠다는 생각으로 중세 철학이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다른 대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지난 해에 석사 학위를 받은 지금의 상황에서, 신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궁금증의 대상은 아니었다는 것과 나는 오히려 신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미치는 '현상'이나 '효과' 같은 것들에 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이를 먹어갈수록 알아가게 되었다.
필자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신 그 자체만의 문제만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사회적 형태에도 그러한 감각을 (어쩌면 오히려 더더욱)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에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엄마랑 같이 어른 예배를 드리면 내가 그래도 이해해서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때부터 부모님과 같이 어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오직 신앙' 만을 외칠 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는 모두 제한적이고 심지어 세상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고민했던 철학조차도 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설교했기 때문이다.
그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워딩이 나에게는 꽤나 역린을 건드리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가득찼고, 그 의구심을 대학교에 가서 마음껏 풀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1학년 1학기가 되어 철학과의 인기 교수님이 수업하시는 인문 교양 수업(수업명은 <서양철학의 전통> 이었다)을 듣게 되면서 나의 갈증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카테고리의 수업들을 계속 들으면서 지식을 점점 더 채워갈수록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현대에 보편적인 종교로 자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결국 1) 그리스 철학, 그중에서도 플라톤 철학을 위시한 플로티누스라는 학자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사상 혹은 13세기에 아랍인들에 의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2) 신앙적 의미에서의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종합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이성에 대한 조화를 주장한 대가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 한 명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철학적 진리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라고 설명했다. 신자였던 아퀴나스는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체계를 채택했고,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결국 이질적인 두 거대 문화가 수렴되어 현대에까지 가장 영향력있는 한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라는 질문에 대해 '과연 그렇지 않다'라는 나 스스로의 대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내가 다녔던 목사님들의 설교 내용이 아퀴나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아퀴나스 역시도 철학은 신학을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위계 자체는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결국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쳐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저 너머 신의 세계에 독점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지닌 의미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귀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강한 부정은 마치 긍정과도 같다는 말처럼, 그러한 강한 부정의 감각은 나를 지금까지 어떤 결로 이루어진 것이건 활발한 동력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인지, 그게 맞는 것인지, 이게 아니라 저게 맞는 것 아닌지' 하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단순히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쁜 의미만을 가지지만은 않은 그러한 부정적인 질문들은 내가 '중세철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여 내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학문적인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석철학을 전공하진 않았고 내가 철학적으로 주장하는 측면에서는 그 분야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4학년 막학기에 들었던 영미철학식의 <종교철학> 수업에서의 여러 가지 논증은 정말 뇌가 느끼는 도파민을 한껏 느끼도록 하기도 했었다.
내가 민감할 수도 있는 종교 이야기를 이제까지 한 것은, 작년 12월에 광림아트센터에서 했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뮤지컬에 대한 감상을 적기 위한 전초 작업을 닦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서론이 굉장히 긴 셈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해당 뮤지컬을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기도 하고, 뮤지컬 덕후여도 관람한 모든 극에 대한 감상문을 모두 작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극은 일생동안 내가 가져왔던 종교적 분야에 대한 흥미를 고취시키는 뮤지컬이었기에 더욱 정성껏 준비하여 감상문을 작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인 '예수'를 다룬 내용인 만큼, 단순히 감상한 것 만으로는 나의 맘에 드는 깊이의 글을 작성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그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복음서에 관한 고찰을 다룬 종교 분야 서적을 여러 권 구매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한 번 파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인 탓에, 더군다나 이렇게 예고를 공개적으로 한다면 써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기에, 내가 내 스스로 일을 벌린다는 걱정과 후회가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또 그러한 창작의 고통 이후에는 그래도 무언가 내 고민에 대한 결정(crystal)이 맺혀졌다는 뿌듯함이 들게 될 것임도 분명하다.
긴 글을 마치면서, 언뜻 보기에 이 글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글의 제목은 사실 사연을 들어보면, 분명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엄마와 아빠 모두 긴 시간을 신앙 생활을 했지만 교회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현재는 두 분 모두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분명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들로 가득한 나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는 거야.' 이번 그리고 이후 2주동안의 글 기고의 주제는 모두 종교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시간을 분야로 본다면 종교철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쏟아 공부를 했고, 이렇게 기어코 종교에 관한 글을 작성하고 있다. 성경에 대해 QT시간에 제대로 공부를 안 했던 탓에 성경 내용이 기억이 많이 안 나서 얼마 전에 엄마에게 통화로 성경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엄마는 신기하다면서, '어떻게 보면 이런 식으로도 유빈이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구나'라고 감탄을 마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니, 그건 엄마의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