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형태로든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이라면, 글을 쓸 때 자신만의 철칙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제 겨우 3개월 차에 접어든 에디터인 나에게는 일종의 철칙이 있었다. 바로 ‘필(feel)’이다. 글을 쓰기 전 여러 주제를 고민하다가, 일명 ‘필’이 번지르르 오는 글감을 선택해 글을 썼다. 주제가 비교적 빨리 생각나더라도 내 흥미를 끌지 않으면 다른 필이 찾아올 때까지 글감을 찾아 헤맸다. 초반 한두 달에는 에디터’라는 칭호를 획득했다는 설렘에 센서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웬걸. 4개월 에디터 생활의 반인 두 달이 지나자 센서는 점차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마치 콩깍지가 벗겨져 썸 타고 설렐 때의 초심을 잃은 연인처럼. 내가 생각하는 ‘문화 예술’, 가령 뮤지컬과 영화에 대한 멋진 평론을 흉내 낸 글을 매번 써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글감을 찾으려고 해도 이 ‘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오래 사귀면 내숭을 내려놓고 하나씩 포기하듯이, 마감을 맞추기 위해서는 ‘멋진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했다. 일상과 작은 대화, 생각에서도 글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일기부터 시작해 친구들과 나눈 메신저 대화, 책상 옆 책꽂이에 꽂힌 책의 제목까지 유심히 살폈다. 그러던 중 글감의 덫에 빠진 오늘의 내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변영주 감독의 『창작수업』이다. 이미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둔 책의 제목이 내 관심을 끌었다.
소제목을 살피며 가벼이 종이를 넘기다, ‘취향의 호수를 만들어라’라는 문구의 챕터에서 손이 멈췄다. 창작자가 되고 싶다면 누구보다도 다양한 종류의 문화 예술 작품을 접해야 하고, 부지런히 보다 보면 그중에 취향을 찾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특정 장르가 싫다면, 그 장르가 싫은 이유를 찾기 위해 되려 싫어하는 장르 작품 여러 개를 진득하게 보고, 듣고, 읽어 내가 싫어하는 이유를 찾는 것도 좋다는 것이 변영주 감독의 요지였다.
이 챕터를 읽으며, 그동안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을 회피하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학창 시절 내내 TV 속 프로그램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선생님들의 충고와 다그침을 열심히 흡수한 학생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20대 초반까지도 매체 시청 시간을 시간 낭비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리고 편협한 생각을 가졌던 내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최후의 보루는 아이돌과 책, 그리고 뮤지컬이었다.
협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나는 어떤 연유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을까? 문화 예술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계기로, 나는 영상 매체와 ‘친해지길 바래’를 반강제적으로 찍게 되었다. ‘시험공부’를 핑계로 미뤄온 영화, 드라마 시청이 이제는 내게 필수 과목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강제 시청하게 되었다. 남들에게는 취미로 굳어져 자연스럽게 휴식 시간이 된 매체 시청이 내게는 과제처럼 ‘최소 주 2회는 보자!’라는 규칙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 반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비해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다. 불호인 국악만 몇 달을 듣던 변영주 감독이 끝내 자신의 취향인 가야금산조를 발견한 것처럼, 나또한 약 70개의 영화를 폭식한 끝에 조금씩 내 취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유혈이 낭자하는 영화는 무섭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피해오던 내가 ‘킬빌’을 보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마피아 조직 이야기는 유치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가졌던 내가 ‘대부 3부작’을 보며 마피아 보스의 인생을 안쓰럽게 여기며 눈물지었다. 매체를 통해 다양한 사람의 인생을 접하고, 되려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이제는 영화,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연애 프로그램 시청도 시작했다. ‘나는 솔로’, ‘커플 팰리스’, ‘하트시그널’ 등을 열심히 보던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는, 지금 엄마보다 빨리 ‘솔로지옥4’의 에피소드를 섭렵한 후 빨리 보라고 다그치는 과몰입 시청자가 되었다.
과거의 나는 문화 예술의 근본이 ‘무대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무대 예술만이 주는 현장성만을 좋아했다. 영화, 드라마보다 마이너한 취향에 속하는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에서 일종의 특별함, 독특함을 느끼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나는 정말 안일했고 게을렀다. 내 의견과 고집에 사로잡혀 매체의 매력을 제대로 접해보지도 않았고, 싫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싫은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우물 속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폭력을 ‘퍼포먼스’로만 사용하는 스토리 전개를 싫어하고,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해 사건을 해결하는 캐릭터를 싫어한다. 그러나 ‘폭력이 있는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이제는 안다.
이 변화는 내 마음속 우물의 장벽을 해체해 나가는 초반 과정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내 우물을 넓혀 호수가 될 수 있도록 '영화 작품 도장 깨기' 작업은 계속된다. 언젠가는 나도 낚싯대를 들어 올려 나만의 이야기를 끄집어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