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은 무언가를 담고 있다’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과연 영화 같은 삶이 행복하기만 할까란 생각을 한다. 가령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 작품의 1막에서 ‘총’이 등장하는 것이 비춰졌다면, 그 총은 극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이다. 마치 지루한 부분을 잘라내고 압축된 인생과도 같은 작품에서, 등장한 장치는 반드시 사용되어야만 하고 깔린 복선은 회수되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경제적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어떤 것이 복선이 될지, 결국에 발사될 총의 트리거가 될지 알 수 없는 순간순간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다간.. 한 걸음조차 내딛기 어려운 삶이 되지는 않을까. 과연 내 삶이란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하지만 동시에 진정으로 영화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순간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삶의 장르가 멋진 성장영화가 될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될지는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달려있다. 아름다운 결말에 다다를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마이라 칼만,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은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인 마이라 칼만의 그림 에세이이다. 올해 75세가 된 저자가 펴낸 최근작으로, 세상과 사람을 관찰하며 인생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 깊숙한 울림을 남기는 시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유명한 그는 전 세계 평단과 팬들에게 '마술적 스토리텔러'라는 찬사를 받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한 전 세계 미술관에 전시를 열기도 했다.
이 책은 무언가를 들고 있는 각양각색 인물들의 그림 86점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이라 칼만은 어느 날 시장에 들렀다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커다란 양배추를 들고 있는 여자를 보고 어쩐지 그 여성의 삶의 일면을 본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 후로 저녁거리, 무거운 짐, 꿈과 실망, 자기 몫의 일, 슬픔 등 여자들이 인생에서 들고 있는 것들을 그리게 되었다고 후술한다.
홀로코스트를 직접 겪으면,결코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어쩔 수 없이 남은 생애 동안그것이 모든 것에서 울려 퍼지는 걸 느끼게 된다.- 도서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중
마이라 칼만이 그려낸 여자들은 방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거나, 책을 읽고, 때론 질투와 슬픔에 사로잡히고, 꿈을 꾸며 절망하고.. 사랑을 한다. 알록달록하고 강렬한 색채로 담아낸 순간들엔 때론 위태롭게, 또 때론 의연하게 버텨낸 우리 모두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삶에서 가지려 애쓰는 것들, 마음에 품은 것들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통해 일상 속에서 쉽게 흘려보내고 있는 우리의 순간들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작품은 ‘나치 군인들에게 피살될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엄마’ 부분이었다. 잔혹하고 절망적인 상황 앞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이 유독 눈에 들어와서 어쩐지 오래도록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바라보게 되었다.
비비드한 색감의 그림과 그 옆의 담백하고도 위트 있는 글귀들로 전체적으로 가볍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이었다. 무엇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무언가를 바라보고 담아내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잠시나마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마음 속에 가장 많이 남았던 글귀와 함께 리뷰를 마무리한다.
모든 사물은 무언가를 담고 있다
우리 주변의 것들은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담고 있다.
모든 걸 갖는 건 힘든 일이며결코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것을 가졌다가 기진맥진하고 낙담할 수 있다.그리고 감정이 차오를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누구든 어떤 날에든 그럴 수 있다.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면 다음 순간이 있다.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꼭 버티세요.- 도서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