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난 순간 주위를 둘러싼 모든 시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시공간은 인간의 삶과 의식을 통틀어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며, 그렇기에 글에는 아무리 배제하려 해도, 시대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 내가 살아온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오정희와 한강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작가이다.
오정희는 1947년생 서울 출신의 작가로,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며 등단하게 되었다.
그는 50년간 한국 여성의 삶과 내면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을 쓰고 많은 수상을 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도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후의 여성 문학사란 오정희를 빼곤 논의할 수 없을 것이며, 한국의 여성 문학 역시 오정희로부터의 영향이 깊게 드러나 있다.
한강은 1970년생 광주 출신의 작가로,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이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2024년 현재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받는 그의 소설은, 초기에는 개인의 고통과 폭력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2014년 『소년이 온다』출간 이후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나아가며 개인보다 더 큰 우리의 역사를 조명하기 시작하였다.
1. 오정희, 「바람의 넋」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오정희 문학 50년은 한국 문학이 여성적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존재론적 성찰의 새로운 지평을 전복적으로 환기한 50년이고, 한국 소설이 새로운 담론과 문체로 정녕 문학적인 문체의 집을 지을 수 있었던 50년이었다"고 평했다.
그의 말처럼, 오정희는 한국 여성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1968년 21세의 나이로 등단한 그는, 전후의 경험과 아픔, 산업화 시기의 여성 서사를 다루는 작가로 크게 거론된다.
오정희의 「바람의 넋」은 198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특히 1970~80년대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개인성과 내면성을 강렬하게 드러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6.25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여성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은 전쟁고아 출신의 아내가 자꾸 가출을 감행하는 탓에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파탄나고 가정이 붕괴되는 전개의 중편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최은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아픔과, 정상 가정에 편입되고자,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여성의 개인적 면면, 그로 인해 생성된 ‘은수’라는 인물의 자기정체성을 탐구해볼 수 있다.
오정희의 「바람의 넋」은 단지 은수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실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과 실상을 리얼리즘의 문체로 보여주며, 그 질서에 순응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여성의 상, 한국의 산업화 시기의 희생된 여성상,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슬픔인 6.25 전쟁에까지 연결하며 그 상처를 반추한다.
2. 한강, 『채식주의자』
이 세계에서 폭력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많이 의식하고, 불행하지만 이 세계를 이루는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느낀다.
한강의 인터뷰 중.
한강은 1970년, 광주 출신의 작가로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으로 당선되며, 전년도 시인 등단에 잇달아, 소설가로도 데뷔하였다. 그는 등단작에서부터 ‘고통’이라는 매개를 첨예하고 예리하게 다루어왔다.
현재 한강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이 개인의 폭력과 고통이 아닌 집단의 ‘국가폭력’에 대해 진술하고 조명하며, 이와 같은 공로와 그 문체의 아름다움과 밀도를 인정받아 2024년, 한국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2016년 맨 부커 수상 당시 “이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불안정하고, 아름답게 쓰여진 것입니다.” 라는 심사평을 받았다.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단편 소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시작한 작품으로, 육식과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세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연작 소설이다. 이 단편들은 각각 주인공 ‘영혜’를 바라보는 그의 남편, 형부, 언니를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주인공 ‘영혜’는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이 온순하고 조용한 여자로, 어느날 꿈을 꾸게 된 이후 점점 육식을 거부하며, 정신 질환이 심화되어 종국에는 식물이 되기를 기원하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 영혜는 속물적인 남편의 태도, 아버지의 폭력, 형부의 예술을 가장한 자기중심적 가부장 폭력에 휩싸이게 되지만, 그가 식물이 되기를 기원함은 단순히 수동적인 저항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오정희의 「바람의 넋」과 많은 부분이 다른 반면 동시에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한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작가인 오정희의 후배 인 만큼 한강 역시 그의 영향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오정희와 한강의 문체는 극명히 다르다. 오정희가 거센 고독에 아우성치는 광증과도 같은 갈증의 문체라면, 한강은 고통이라는 그릇 속에서 손톱을 세워 긁는 축축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이 존재 자체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웠으며, 폭력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다룬다는 것, 그리고 그런 ‘여성 주인공’의 실패의 여정과, 주인공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주변인에 대한 묘사와 설정에서 이 두 소설이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바 있다고 느꼈다.
「바람의 넋」의 주인공인 은수는,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갈망으로 안온한 가정 내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에도 결국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그 가정의 파괴와 함께 자신의 기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음’을 직면하게 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바람의 넋」의 은수처럼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갈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혜는, 가부장적 사회 체제에 순종해오며 ‘평범한 여성상’을 수행해오며 수많은 가부장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는 침묵과 고독의 언어로, 소극적이지만 명확하게 그 폭력으로부터 저항한다. 그 방식은 바로 폭력과 육식을 하지 않는 것, 나아가 ‘식물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바람의 넋」은 6.25 전쟁 서사의 트라우마와 그 아픔에 대해 얘기하지만,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적이며 아주 개인적인 폭력에 대해 다룬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2014년,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다. 그는 꾸준히 ‘폭력’에 대해 이야기해 왔지만, 그의 소설은 개인적인 삶의 폭력과 상처에 대해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그가 현대사의 ‘국가적인 폭력’에 대해 다뤘음은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소설 속 작가는 자신이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