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게 괴롭다. 겉으로는 전혀 힘들만한 이유가 없다. 이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나에게 도파민을 주던 회사도 익숙해졌고, 일은 지루해졌고, 부담은 커진다. 분명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데, 묘하게 즐겁지 않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책 <스토너>를 읽으면서, 주인공의 삶이 보통 사람의 삶과 닮았다. 내가 죽어도 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시골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배워야 한다며 공부를 시작한다. 섣부른 선택(결혼)에 평생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산다. 근데 스토너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분명하고, 찬란한 빛을 경험한 사람이다. 오히려 나보다 낫다. (한 사람의 재미없는 인생을 길게 끌고 읽게 만다는 작가.. 체고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에게 부족한 건 시간이다. 무엇이든 한 김에 끝장을 보고 싶은 성격도, 새로운 일이라면 홀려버리는 유혹하기 쉬운 마음도 모두 문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는 것 같다. 새해 목표를 세우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글쓰기가 가장 끝으로 밀렸다.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한 모습이 조금씩 툭 튀어나와 사람들한테 들킬 때 싫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긴 싫은데,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상처를 줬다는 걸 발견했을 때도 괴롭다. 그렇다고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할 만큼의 이야기는 없다.
고요한 불행이다.
끝이 없기 때문에 그럴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불행의 정체가 '안정' 일 수도 있다. 1년 후 혹은 5년 후의 나의 삶은 지금과 크게 달라져 있지 않을 것 같은 뻔한 결말의 실망이다. 내가 특별한 줄 알았는데,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익숙함이 주는 고요함과 낯섬이 주는 즐거움 사이에 갈등한다.
그렇다고 지금 삶이 무턱대고 싫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다. 생기 없던 일상이 가끔 빛나기도 한다. 여전히 좋은 영화를 보면 설레서, 누구든 붙잡고 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열심히 준비한 일이 좋은 결과를 보여줬을 때 기쁘다.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내 마음을 보여주고 만다. 사람을 많이 만난 덕분에, 대화 몇 마디에 잘 맞을지 안 맞을지 알게 되는 경지에 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안다.
20대에는 모든 게 새로워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견디지 못하는지도 잘 알아서 쉽게 동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게 글을 자주 쓰지 않은 이유다. 이 마음이 계속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고요는 지루하고 뻔하고 재미없는데 평화롭다.
끝에 남긴 평화 하나 때문에 다 괜찮다.
어쩌면 이게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고요의 형태일 수 있다.
스토너의 삶을 함부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누구나 스토너만큼의 행운과 불행이 섞인 삶을 산다.
과연 이게 진짜 불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