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31.jpg

 

기나긴 장편 오피니언을 뒤로 하고, 이제는 짧은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허면 무엇을 쓸 거나, 상념 속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꺼내자면 똑같이 길어질 것이 빤하기에 고민을 좀 하다간, 지금 읽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간단한 독서 일기나 틈틈이 남겨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면 대학 시절 읽었던 그 많은 한국 근대 문학들은 기억 속에 완전히 무로 증발하였다. 언젠가 이 이야기도 썼던 것 같은데, 역시 읽는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보담도 기억 속에 남아 있음으로써 의미의 위상을 지니겠거니.

 

한 번 읽고 영영 사라져버렸으니, 한국 근대 문학에 대한 스스로 미련도 퍽 깊지만 일단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이다. 적어도 뜻이 변하지 않는 한, 혹 충분히 읽었다는 생각에 미치기 전까지는 한국 근대 문학은 이 다음의 순서로 미루어져 있다. 말인즉 한동안은 세계문학 전집 리뷰나 쓰게 될 것이다. 그렇담 이 또한 일련의 시리즈가 될 것인가. 모르겠네…

 

시작을 장식하는 오늘의 책, ‘달과 6펜스’이다.

 

*

 

아, 짤막한 서평에 앞서 서론을 조금만 더 늘어뜨려두자. 아무래도 세계문학 전집으로 접하게 될 고전 텍스트의 저작 연도가 주로 1900년대이다 보니, 전 시대적인 사유와 자주 마주치고 있다. 허나 본 리뷰(어쩌면 시리즈가 될)에서는 그와 관련된 문제의식은 굳이 배제키로 한다. 애초에 내가 그걸 조리 있게 다룰 능력도 없거니와, 그랬다간 내 머릿속의 변증 장치가 연산 오류를 일으켜 또다시 장황함의 늪으로 빠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 시대적인 것을 소위 ‘야성적 野性的’이라고, 이하 표현키로 하자. 나는 이 표제가 썩 마음에 든다. 공교롭게도 내가 ‘북적북적’ 어플리케이션에 별점 4점 이상으로 기록해둔, 아마 앞으로 리뷰에 돌입하게 될 고전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야성’에 있었다. 추후 다루게 될 ‘그리스인 조르바’가 으뜸이긴 하지만, 이 책은 못지않게 아주 야성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르바’ 그 이상일 지도 모르겠다. 

 

야성 野性, 혹은 야수성 野獸性. 그 둘 간의 관계가 상보적이면서도 어딘가 모호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듯이, 책을 바라보는 내 태도 또한 오묘하기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러한 미묘함은 차치하고 (텍스트의 길이를 위하여), 그것이 지니는 힘과 위력에 나는 집중한다. 그 힘이 나를 빨아들여, 매료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야성 野性 :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

 

* 야수성 野獸性 : 들짐승처럼 난폭한 행동이나 성질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창작된 캐릭터라 알려져 있다. 실제 폴 고갱의 일대기를 읽어보지 않아 정확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 책을 토대로 보자면 그도 대단한 광인 狂人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스트릭랜드는 사십 평생을 은행원으로 살다가,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족을 떠났다. 그건 정말로 느닷없는 일이었다. 책조차도 그 전조를 덧대거나 그의 심리를 굳이 파헤치지 않아서 우리는 결코 그 경과를 알 수 없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그의 파격 破格이 불러일으킨 필연적인 대가, 이를테면 일신의 안위라든지, 현실적이고도 물질적인 고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이 진실된 마음의 부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건 참 의뭉스러우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단어이다. ‘진실된 마음의 부름’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사건의 모든 원인을 증보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사십 줄까지 직장 생활을 영위해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책은 그의 회사 생활을 묘사해주지 않으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파리에서 마주한 스트릭랜드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제 생각 외에 크게 관심이 없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도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데,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여된 바로 그것 혹은 그것과 연관된 것들을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 한, 부재는 문제의식으로 발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귀찮을 뿐이다.

 

 

”어쨌든 난 관심이 없소. 그녀가 어느 쪽을 택하든 그건 내 문제가 아니오.”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것 보세요. 우리를 그처럼 바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선생께서 어떤 여자와 이곳으로 왔는지도 이미 알아냈습니다.”

 

그는 약간 놀라는 기색이더니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제 말에 웃을 만한 게 있습니까?” 

 

”가련한 에이미.” 그는 웃는 듯하더니 매우 냉소적인 표정을 보였다. “여자들 마음이란 딱하기 그지없군! 사랑, 언제나 사랑뿐이야, 왜 남자가 떠나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당신은 내가 한 여자를 위해 바쳐온 일을 다른 여인을 위해 또 다시 재현할 만큼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이나?” 

 

(중략)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내를 버렸습니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요.”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2004, 71p

 

 

사회 통념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얼마나 꾸준히 영위되는지를 통해서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적어도 그는 늦게나마 불씨를 틔워올린 그림에 대한 자신의 예술혼,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한 줌의 관심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빈곤한 처지와 현실 생활마저 말이다.

 

타인에 대한 지극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그의 이기성은 ‘더크 스트로브’와의 일화에서 극점을 찍어버린다. 스트릭랜드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더크는 약값도, 돌봐줄 이웃도 없는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지극히 간호한 대가로, 그의 아내 블란치와 심지어 자기 집을 빼앗겨버린다. 그것도 다 웃기는 일이다. 여담이지만 달라고 홀랑 내주는 더크도 여러모로 결여된 인간인 셈이다.

 

스트릭랜드가 풍기는 무심하면서도 압도적인 자존감, 그리고 야성적 관능미에 블란치는 자신을 내던져버린다. 본의 아닌 금욕 생활로 정욕이 차오른 스트릭랜드는 우발적으로 블란치를 취하지만, 자꾸 자신을 옭아매려는 블란치를 이내 귀찮아하며 가차 없이 내버린다. 블란치는 곧 자살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한다. ‘나’는 모멸과 멸시, 증오를 느끼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다.

 

 

"함께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난 스트로브 못지않게 놀랐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말해주었소.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면 그녀는 내 곁을 떠나야 한다고. 그녀는 그런 것쯤은 각오했다고 대답했던 거요.”

 

”그녀는 훌륭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소. 그래서 나체화를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났던 거요.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소.” 

 

(중략)

 

”무슨 이유로 저에게 이러는 겁니까? 제가 당신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스트릭랜드는 기분이 좋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나에 대한 당신의 그런 말투에 대해서, 즉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오.” 

 

나는 갑자기 치미는 분노로 내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무감각한 이기심으로 인하여 상대방이 얼마나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를 그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보호하고 있는 냉담성을 깨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한 말 속에 내포된 진실성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마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의견에 대한 상대방의 관심 여하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보다. 아마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존심에 가장 쓰라린 상처를 입히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화난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2004, 235~240p

 

 

플롯의 중심을 이루는 스트릭랜드의 성격 묘사는 이 정도로 해두자.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제외하고서는 아무것도 관심 갖지 않았다. 다가오는 호의는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마음껏 이용하고, 싫증이 나면 내팽개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은 그에게 있어 아무런 상관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인 과정일 뿐이었다.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이 그의 전 관심사였다.

 

기묘한 것은 그의 이기성은 사회의 무관심을 통해 얼마든지 발현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회가 먼저 내주지 않았다면 스트릭랜드로서는 그것을 억지로 빼앗거나 꾀 내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다가오는 것을 철저히 편취하되, 굳이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로선 마다치 않았을 따름이다. 물론 우리가 그런 결과를 원했을 리는 없지만, ‘바라는 것도 바랄 만한 사람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나도, 어딘가 비틀려 있지는 않은가 심심하게 생각한다.

 

 

그는 가난한 직공보다도 더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그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인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만든다고 느끼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돈에 무관심했으며, 명예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굴복하는 현실과의 어떤 타협에의 유혹에 저항했다 해서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그는 그러한 유혹을 받은 일조차 전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현실과의 타협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도 스쳐 지나간 일이 없다. (중략)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지향하는 바를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희생시켰던 것이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2004, 257p

 

이 같은 사실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었던 교훈은 작가란 자신의 작품을 쓰는 즐거움과 그의 마음속에 쌓인 복잡한 생각들을 토해내는 데서 보람을 얻을 뿐, 기타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다는 것, 즉 칭찬이나 비난 또는 실패나 성공 등에 일체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2004, 15p

 

 

이 책은 예술혼에 대한 가감 없고 솔직한 묘사이다. 아 물론, 예컨대 릴케처럼, 예술혼과 인간성 사이에서 조화를 이룬 예시도 실제 얼마든 많겠지만, 무엇엔가 완전히 미쳐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등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 또한 사실일 테다. 그는 그 자신을, 그 자신의 생활을 가장 먼저 등한시함으로써 유일한 목적인 예술을 위한 제물로 바쳐버렸으므로 그 외 바깥의 것에까지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이해의 의미에서, 책의 서두(15p)에 등장한 작가론에 심심한 동감을 표한다. ‘작가란 자신의 작품을 쓰는 즐거움과 그의 마음속에 쌓인 복잡한 생각들을 토해내는 데서 보람을 얻을 뿐’ 여타 다른 것, 예컨대 세속의 성공과 만인이 누리는 최소한의 행복을 돌보지 못한다는 것, 나는 그 상태가 행복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갈증임을 생각한다.

 

 

더는 내게 창작욕이 남아 있지 않지만 한동안은 그것에 몰두한 바 있다. 그것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게도, 스트릭랜드에게도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오직 그것을 얼마나 영위해나갈 수 있는지 만이 중요한 것이다. 결과는 과정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 얼마나 많은 의뭉과 조소를 나 또한 앓았던가?

 

무릇 내가 일찍이 구상한 바를 끝마치기 위해선 적어도, 나는 아직 골방에 갇혀 진득한 고독 속을 뒤척이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일찍이 맡았던 가득 찬 먼지와 고요의 내음을 기억한다. 만약 아직 내가 기꺼이 내 삶과 지금을 광기에 바치고 있었더라면, 꿈꾸던 미래에 가닿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며,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나긴 광기의 상태, 즉 목적을 위해 기꺼이 많은 것, 바칠 거라곤 아무런 가치도 지닐 수 없는 시간뿐이나마 열렬히 바치게끔 하는 비정상적이고 맹목적인 상태란, 한갓 결과의 약속만으로는 영위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성공적으로 그러한 열정 혹은 광기와 작별했다. 현실과의 유리 遊離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거나,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 욕망, 지극히 세속적인 것과 이상 理想 사이의 저울질을 끝냈고 마침내 선택했다. 나는 현실과 지금을 택함으로써, 미래와 만약을 버렸다. 그러자 내 삶은 행복해졌다. 허나 이 책은 내가 차마 가보지 못한 반대편 길을 들춰냄으로써, 아주 잊어둔 호기심을 자극한다. 유일한 목적을 향한 광기, 그리고 그 과정의 야성적 행태를 통해서 나를 자극한다.

 

 

자,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이다. 생시에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은, 사후 유품 경매 과정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이내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죽은 후에나 인정받은 작품들이란. 애초부터 그에게 결과는 아무런 위상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진실된 마음의 부름’이 일으키는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끝없이 소금물을 부었을 뿐이다. 그때 갈증에 휘청이며 내달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우리는 야성적이라고 일컫는다. ‘야성 野性,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

 

그는 유언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역작을 불에 태워달라고 요구한다. 그 부탁을 받아 역작을 목도한 사람은 무방비 상태로 “이것은 진정 천재의 작품이다” 하고 탄식한다. 그는 실낙원을 형상화한 듯한 그 그림을 차마 태우지 못하나, 스트릭랜드의 아내는 기꺼이 유언대로 그 그림을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후에 지닐 수 있는 것은 스트릭랜드로서는 못마땅했던 실패작들, 그리하여 창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미완성작들뿐이었다.

 

도중에 그만둘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그건 애초에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가닿을 수 없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짧았던 광기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오솔길 둔덕에서 그 길을 다시 되돌아본다. 여기엔 달과 별이 가만히 떠있었고, 가로수 몇과 더불어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다. 함께 천천히 걸으며 이내 나는 행복했다. 허나 멀리서 구경하는 저 길은 얼마나 아찔하고, 또 아름답던가.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