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 빚어낸 이야기 - '구미식' 이홍도 작가, 전인철 연출

글 입력 2025.01.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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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구미식_포스터(진짜최종)_Edit.jpg

 

 

"가상의 지방도시 구미에서 클로짓 게이이고 마약중독자인 '톰 윌리엄스'는 새마을기념공원에 있는, 가상의 국가 지도자를 모델로 삼는 '행복한 동상'과 마주친다…"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2월 21일부터 3월 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구미식>은 시놉시스부터 혼란스럽다. 이 극은 뜻밖의 만남과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 가득하다. 어떤 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2025년 1월의 현실과 만나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인물들이 구미라는 공간에서 부딪히는 가운데, 맥락 없는 광고 팝업창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의도된 혼란 속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하지만 실소와 냉소 사이를 오가던 이야기 속에 불현듯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고민도 함께 떠오른다. ‘완전히 버리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터전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고. 이번 작품을 함께 만든 이홍도 작가와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 연출은 이야기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균열에 집중한다. 그 틈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25년의 현실과 만난 <구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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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식> 전인철 연출(좌), 이홍도 작가(우)

 

 

<구미식>은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요? 이홍도 작가님과 극단 돌파구의 만남이 궁금합니다.

 

전인철(이하 ‘전’): 기존의 드라마 작업하고는 동떨어진 글쓰기를 하시는 이홍도 작가님을 보며 새로운 작업을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 후 달에 한 번씩 만나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 대화하며 작품을 구상했죠. 그렇게 2022년 여름을 지나며 초고가 완성되었어요.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이홍도(이하 ‘이’):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마침 연출님이 작업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때 연출님의 이전 작업인 <국부>가 떠올랐어요. 박정희라는 인물을 다룬 작품인데, 구미에서 태어나 쭉 자란 입장에서 굉장히 흥미로웠거든요. 그런 작업을 하시는 분이라면 제가 어떤 제안을 하든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실 거라는 신뢰가 있어서 저도 자유롭게, 과감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극작가로서 그런 작업이 아무 데서나 가능한 게 아니란 걸 알기에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초고는 2022년에 완성되었다고 하셨는데, 극에서 ‘행복한 동상’이 자유대한민국이나 계엄령을 언급하는 모습을 보며 꽤 최근까지 고쳤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 놀랍게도 작가님이 초고에서 수정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작가님 고향이 구미고, 구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마을운동기념공원과 박정희 동상이 나오고, 그래서 자연스레 계엄령 이야기도 나왔던 것이죠.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옛날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현실과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처음 대본을 썼을 때는 젊은 작가인데 과거 이야기와 역사를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지금 이 시점에 공연을 보면 동시대의 이야기로 느끼는 분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시대를 앞서갔다기보다는 시대가 역행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작가님의 전작도 그랬지만, <구미식>도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전통적인 드라마와도 거리가 멀어서 난해한 느낌이 강한데요. 연출님은 처음에 초고를 봤을 때 어땠나요?

 

전: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 컸어요. 솔직히. (웃음) 물론 이런 작업을 하시는 분이기에 협업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저도 작가님 작품을 무대에 올라간 형태로만 만났던 거죠. 텍스트로만 된 초고를 접했을 때는 굉장히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했어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을 준비하며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아마 처음 보시는 분들에게는 꽤 낯설 것 같아요.

 

이: 제 작품은 관객 반응이 반반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흥미로워하시는 분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시는 분들. 관객만이 아니라 연극 평론을 하거나 심사를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리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열려 있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고, 연출이 어떨지 기대가 되기도 해요. 저는 중간중간 떠오르는 광고 팝업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무대에서 이 모습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전: 희곡을 읽으며, 이 작품이 구성된 방식이 스마트폰의 작동 원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스마트폰을 볼 때 한 가지를 쭉 집중해서 보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작품으로 말하자면 톰 윌리엄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광고 팝업창이 떠서 그걸 지우고, 갑자기 또 행복한 동상 이야기를 읽다가 ‘아 맞다’ 하면서 다시 톰 윌리엄스에게 돌아오는 식이죠. 그러한 모습을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는 아직도 고민이 많아요.

 

이: 작가마다 성향이 다를 텐데 저는 제 희곡이 그대로 무대에 올라가기를 고수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이 작품을 경유하는 모든 이들이 각자 해석에 따라서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는 열린 텍스트를 지향합니다. 그럴 때 더 창조적인 작업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 역시 극단 돌파구의 여러 가지 해석과 만나 다양한 가능성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 빚어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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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식> 배우 안병식

제공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윈윈픽쳐스

 

 

<구미식>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등 여러 텍스트가 얽혀 있는 작품인데요, 작업 과정이 어떠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기존의 텍스트를 한 번 비트는 방식의 작업을 할 경우 처음부터 원작이 되는 텍스트를 정해놓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저는 반대였어요. 어떤 토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발상이 부유하다가 기존의 텍스트가 거기에 결합한 것이죠. 

 

나고 자란 구미 이야기를 쓰려니 박정희 동상 이야기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 『행복한 왕자』가 떠올랐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구미에 사는 어떤 인물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속 ‘톰’과 만나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죠. 초고 단계에서 그러한 역동적인 결합의 과정을 겪으며 지금의 <구미식>이 되었습니다.

 

 

구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외에 작가님이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이: 구미공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구미에 갈 일이 한동안 없었어요. 군대 휴가 중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는데, 예전에 알던 동네 친구들과 저의 삶이 크게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이 꽤 충격적이었어요. 부채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때 느낀 이상한 감각이 제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죠. 그걸 작품으로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사실 저는 지금의 구미를 잘 몰라요. 그래서 막상 작품을 쓰면서는 오히려 지금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극이 진행될수록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두 분에게 작품 배경인 ‘가상의 지방도시 구미’는 어떤 공간이었나요?

 

이: <구미식>이 구미 이야기지만 구미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는 것이 제게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일단은 제가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구미의 모습이 반영되었어요. 산업근대화를 겪고 이제는 쇠락하는데, 그 시기의 이념은 아직 남아 있는. 

 

그런데 그 모습이 동시대 대한민국 사회의 역행과 퇴행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로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초고를 쓰던 시기에 여러 뉴스를 보며 ‘아, 이거 구미 식이다’ 하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지금 이 시대가 근대 산업화 시기의 가치를 다시 좇는 듯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구미의 메커니즘이 동시대에도 사회, 정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구미식>은 표면적으로는 작은 도시 구미에 관한 이야기지만 저 역시 의미를 확장해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앞서 작가님의 말씀을 빌려 정리하자면 대한민국의 역행과 퇴행을 보여주는 방식이 ‘구미식’이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도 있겠네요.

 

 

주인공인 ‘톰 윌리엄스’라는 인물도 흥미로웠습니다. 클로짓 게이라는 설정도 그렇지만 톰이라는 이름부터가 구미라는 도시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죠.

 

이: 앞서 말씀드린 부채감과 고민 속에서 구미공단에 대한 기억, 거기서 알고 지냈던 이들의 삶과 전해 들었던 삶, 그리고 유리동물원』에서 집을 떠난 톰의 삶이 딱 연결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톰 윌리엄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지요. 구미에서 파생되는 전형적인 것들이 아니라 이질적인 대상들을 딱 붙여놨을 때 만들어지는 충돌과 혼란이 작품을 쓴 저한테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시스템에서 탈주하는 순간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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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식> 배우 이진경

제공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윈윈픽쳐스

 

 

<구미식>에서는 여러 개의 결말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이유에 관해서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고, 그걸 부정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이야기에 다층적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자연스레 여러 개의 결말로 이어졌고요. 각각의 결말은 논리적 인과로 연결되지는 않는, ‘멀티 엔딩’에 가까운데요. 이것들이 모여 콜라주 혹은 프랙탈 구조처럼 관객의 머릿속에서 다시 소화되기를, 그리하여 적극적인 해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 저희도 연습을 하면서 결말을 정리해 볼 생각은 못 했는데, 하나씩 곱씹어 보니 재미있네요. 관객분들도 작품을 다 보고 난 후 여러 결말을 짚어보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스포일러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저는 ‘광고 딱지’와 관련된 결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많은 광고가 등장하고, 환상과 실제, 허상과 실재가 대비되는 부분이 곳곳에 있죠.

 

이: 광고 딱지로 대표되는 프로파간다의 세계, 구미식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의 논리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이냐 생각해 볼 수 있는 결말일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일부가 될 수도 있고, 그러한 체계에 반하는 어떤 실재로서 존재할 수도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인물들이 후자의 모습으로 제시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미식>은 일종의 블랙코미디인데, 작가님의 앞선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결이 느껴져요. 블랙 코미디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 성장배경의 영향인지 밝은 이야기, 감동스러운 이야기에 불편함을 느끼곤 해요. 오히려 어둡고 조금은 삐딱한 인물들, 부정적인 감정에 더 마음이 가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저 혼자 안고 있다면 소외된 느낌일 텐데,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예술인 연극 안에서 펼쳐 보이면 이것을 매개로 창작자들, 관객분들과 좀 더 역동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저한테 어떠한 돌파구가 될 때가 많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이 작품이 자조적인 한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랑 맞지 않아도 부정하거나 지울 수 없는 삶의 터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프로파간다와 허위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욕망은 계속 자극받을 거예요. 저는 그런 와중에서도 체제의 균열을 목도하는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예컨대 이번 비상계엄령 이후 우리는 집회에서 연대의 순간을 여럿 봤잖아요. 저는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잠깐이나마 탈주하는 순간들을 계속 응시하고, 그러한 경험이 우리 안에 하나씩 쌓여가는 것을 소중히 하는 삶을 상상합니다.

 

 

마지막으로, <구미식>을 보러 오는 관객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블랙코미디라는 장르가 어떤 세계를 부수고 그 이후에 재건되는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 세계의 균열을 응시하고 그로 인해 각자 어떤 가능성들을 꿈꿔 보게 만들 뿐이죠. 저도 작가로서 계속 그것을 고민하는데요, <구미식>으로 그 균열과 가능성에 대하여 관객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곳에 애정을 갖고 있으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기자님 말이 기억에 남네요. 저도 관객분들이 <구미식>을 어떻게 볼지 정말 궁금합니다.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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