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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능력이 자격이 될 수 있을까?'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장장 400페이지 동안 능력주의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기원한다. 전자는 공정해 보이고 후자는 부정한 것 같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뿐. 얼핏 공정해 보이는 이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아주 손쉽게 차별의 근거가 된다. 그저 능력에 따른 정당한 결과라고 이름 붙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능력이라는 것에 어디까지의 자격을 부여해야 하는가. 책을 읽다 보면 능력에 따른 대우라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거한 상식과 공정이라는 이상이 계속해서 충돌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쌓아 올린 능력주의라는 완벽한 시스템은 애초부터 불완전한 개념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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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코리안 드림


 

미국이 기회의 땅이 된 것은 어디서 출발하든 능력만 있다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이고 미국 정치인들(주로 진보성향의)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아젠다이다.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그 감각, 얼마나 매력적인가. 불평등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미국에는 '계층 이동 가능성'과 '사회적 상승 찬가'가 있기에 사회적 분노가 그리 심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코리안 드림, 한강의 기적. 변변한 인프라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국민의 노력으로 빠르게 산업 발전을 이룩했고 노력만 한다면 부를 거머쥘 수 있었던 시기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한국에도 능력주의, 정확히 말하자면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 공정하다는 착각, 145p

 

 

이 같은 이동 가능성은 이전만큼 공고하지 않다. 지배계층이 지배계층으로, 피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으로 세습되는 것은 그 방식이 달라졌다 뿐이지 여전하다. 미국인들의 믿음과 달리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지는 나라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르지만,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에서는 그 절반 정도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교육의 기회는 결국 지배층에 더 많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기회의 땅이라는 말은 미국보다 오히려 중국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다리 간의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는 점이다. 사다리는 낡았다. 이제는 현재의 불평등을 다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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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능력주의가 완벽히 실현되며 사다리가 고쳐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 윤리 자체가 옳은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재능이 받는 보상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도덕은 편견을 정당화한다. 세계 사회는 분명 인종과 성별, 혹은 여타 소수에 대해 포용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엘리트층과 노동계급, 즉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면책적 편견이다. 왜 재능은 여타 수저론과 달리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할까? 재능 또한 타고난 것이며 그 재능이 현재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는 상황 또한 온전한 운일 수 있다. 노력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천부적 재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은 능력주의 신념을 흐리게 만들기에 의식적으로 노력과 수고를 강조하며 본질을 왜곡한다.

 

 

 

능력이 있는데 이 정도는 누릴 자격이 있지


 

샌델은 능력주의가 사회적 구조뿐 아니라 승자와 패자 개인에게도 악영향을 미침을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풍기기 시작한 이 퀴퀴함의 정체를 드디어 정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트주의적 자만. 이것은 성취감과도 자존감과도 다른 것이다. 승자들의 비대한 자아에 가깝다. 자신이 이룬 능력주의 하의 업적을 너무나도 굳게 믿는 나머지 앞으로의 인생 내내 이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과도한 자신감이 주는 자만이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나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지나친 부담이다. 시민적 감수성에도 유해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 공정하다는 착각, 37p

 

 

미국과 한국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끝없는 입시 경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심지어는 학생 부모의 시간까지 말이다. 이 극성 학부모의 등장이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한가인 씨가 14시간 동안 자녀들의 학원 라이딩을 한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봤을 때의 기분이 얼마나 기묘하던지. 온 가족이 투입되는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 뒤에 찾아오는 합격이라는 보상을 운으로 격하시킬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층의 지인들이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발언을 할 때마다 이 고약한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의아할 때가 있다. 끝내 이룬 성취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앞으로의 자신의 모든 행동에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 뭐, 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착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반대의 위치에 있는 패자들은 어떤가. 샌델의 말에 따르면 이 능력주의 사회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하면 된다는 말은 반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과 같다. 명제가 참이면 대우도 참이니까. 따라서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순전히 본인의 탓으로 실패한 것이다. 결과의 평등이라는 말은 저기 어디 빨간색이 묻어버린 사회주의적 생각이라도 된 듯이 기피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평등이란 주로 기회의 평등이다. 기회를 분명히 줬는데, 그 기회가 그렇게나 평등했음에도 결과가 불평등한 것은 그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사람 위에 사람을 둘 도덕적 정당성이 생기는 것이다. 

 

 

하층계급 백인의 인종주의를 혐오하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유주의 엘리트는, 인종주의를 단죄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옳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의 특권'을 백인 노동계급에게 들먹이며 비난하는 게 어떻게 그들에게 무력감과 울분을 심어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노동계급이 가진 기술을 비웃는 능력주의 질서 아래서 어떻게든 명예와 인정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다.

 

- 공정하다는 착각, 316p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하지만 그 아래가 없어졌을 때 패자들의 굴욕은 분노로 변한다. 약자에 대한 혐오는 약자가 약자가 아니려고 할 때 더 심해진다. 자신보다 아래에 있었던 소수자 계층이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새치기를 당했다고 느끼게 한다. 따라서 이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패자들, 즉 노동계급 구성원이나 엘리트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이전의 불평등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능력주의라는 것은 정신적 건강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쥐여준다. 하지만 그래서, 대안이 있는가? 

  

저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유 헌정론>에서 제시된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존 롤스의 <정의론>에 등장한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지금까지 논의된 예시로 제시한다. 전자는 보상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와 상관이 없고 다만 공급의 가치에 기댄다는 사상이다. 복지국가 자유주의는 재능의 차이 또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적 요소로 보기 때문에 승자가 그것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그 소득을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가 패자에게 보상해 주는 것이다. 이 둘은 결국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능력에 근거하면 안 된다'고 공통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능력과 가치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하이에크의 주장이, 또 복지 수혜자들을 무능력자들로 낙인찍는다는 데에서 롤스 철학의 한계점이 드러난다. 이들은 능력주의에 반하는 주장을 펼치지만 결국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엘리트 관료주의는 타파되어야 하는가


 

샌델이 결말부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간단하다. 테크노크라시를 타파하고 공동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테크노크라시란 전문성을 가지는 기술관료가 사회를 관리하는 체제다. 저자는 이 엘리트 관료주의하에서는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시장경제를 채택하게 되며 이념적 논쟁이 거세된다고 한다. 실용적이고 초당파적인 정책은 사실 중도에 가까운 필자의 성향상 그 자체로는 부국강병을 위한 합리적인 결론이다. 전문가를 무시한 정책은 그 자체로도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테크노크라시가 오히려 포퓰리즘과 국수주의라는 정치적 반격을 불러온다며 미국의 2016년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을 그 예시로 든다. 올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Society will be 'merit-based' and there will be 'only two genders'"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저자가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전제는 "조건의 평등(equality of condition)"이다. 모두가 같이 부유해지자거나 모두가 같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결과의 평등도, 같은 기회를 주었으니 그 이후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기회의 평등과도 다르다. 부를 쌓지 못한 사람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읽으며 마음을 답답하게 누르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아니, 이건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 이상과 합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과적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조건의 평등, 좋은 말이다. 하지만 부를 쌓지 못한 사람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시민 개개인의 인식 문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민의식의 함양이다. 이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꼭 무너뜨려야 하는가? 정확히는, 능력주의의 한계점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병폐를 충분히 인식하고 납득하였지만, 그 제도를 무너뜨리고 대체할 만한 공정한 안이 제시되었는가?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 공정하다는 착각, 353p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뭔가 해줘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답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승리자들이 개인의 성공 또한 행운의 일종임을 인식하고 자만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 만날 것"이 충족된다면 공동선을 함양할 수 있고 그것이 능력주의의 폭정을 상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연대와 논쟁의 문제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처음 나왔던 제임스 애덤스의 <미국의 서사시>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의 결괏값으로 사회적 상승뿐 아니라 더 폭넓은 평등을 다루었다. 공공의 공간에서 함께 논쟁할 수 있는 존엄함의 평등, 엘리트와 노동계급이 나누어진 공간이 아니라 함께 논의할 공동선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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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 엘리트층과 노동자 계급이 함께 있을 공간, 필자는 그 공간의 가장 현실적인 시작이 결국 학교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엘리트주의를 공고히 하는 역할로 강조되며 옆에 서 애꿎은 돌을 맞은 경향이 있다. 그 가치가 저평가되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공교육은 활성화되어 있으며 그 수준이 절대 낮지 않다. 대학교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함께 동일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기관.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 시작이자 끝인 이 교육은 체제를 비판하며 언급되었지만 동시에 그 해결 방법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관점에서 쓰인 미국 사회에 대한 책이기에 우리 사회에 적용했을 때 납득이 가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샌델이 마지막으로 주장했던 시민의 연대를 통한 의사결정은 주정부의 힘이 강한 미국에서 탈중앙화의 형태로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앙정부의 힘이 강한 한국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능력주의 신화가 점점 이상화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샌델이 제기하는 의문은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점 중 이 글에 담은 것은 불과 두 가지뿐이니 능력주의와 엘리트 관료주의, 무엇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면 꼭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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