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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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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한없이 밉다가도 결국 사랑하고 마는 그 질긴 면발 같은 인연. 깨질까 부서질까 품 안에 소중히 품고 있는 보물같이 대하다가도 오랜 세월 사용해서 질려버린 소모품처럼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것이 가족인 것 같다. 그래서 이 관계가 참 얄궂은 관계라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결말이다. 이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관계일지언정 이들의 상실은 가정의 붕괴를 초래한다. 가정은 곧 삶이요, 정신세계이다. 상실의 고통은 이겨낼 수 있지만 완치되지 않는다. 이별은 반드시 찾아오지만 그러나 가슴속에 흔적을 남긴다. 곁에 없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미셸도 그렇게 살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보편적인 가정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가족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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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랑하니까


 

미셸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전적으로 한국 문화를 접했다. 손맛이 타고난 어머니 덕분에 미셸은 완전한 한국인 입맛을 가지고 성장했다.

 

 

음식은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엄마는 겉보기엔 지독한 잔소리꾼이었지만─자신의 억지스러운 기대에 부응하도록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던 탓에─내 입맛에 꼭 맞춰 점심 도시락을 싸주거나 밥상을 차려줄 때만큼은 엄마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H마트에서 울다 中

 

 

미셸은 은미 이모와 어머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미셸은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H마트를 방문한다. H마트는 아시안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으로 H는 한 아름의 줄임말이다. 웬만한 한국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셸 가족은 도시에서 10km쯤 떨어진 숲 속에 있는 집에 살았다. 이웃이라곤 하나도 없었기에 친구도, 가까운 편의점이나 공원도 없었다. 그런 미셸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의지할 사람이라곤 엄마뿐이었다.(편의 상 미셸의 어머니를 '엄마'로 지칭하겠다.) 엄마는 자식을 항상 어르고 달래는 자애로운 어머니는 아니었다.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 H마트에서 울다 中

 

 

책 속에서 서술되는 엄마는 온화하고, 이성적인 완벽한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다. 외모에 집착이 심해서 항상 홈쇼핑 채널을 틀어놓고 온갖 안티에이징 제품들을 사 모았다. 옷과 구두, 가방들은 10년을 사용해도 새것처럼 관리하고, 집안일을 할 땐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청소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엄마의 규칙과 기대 속에서 미셸은 어린 시절 내내 두 가지 충동이 분열된 채로 지냈다고 서술했다. 어느 날엔 결국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선머슴처럼 행동했다가, 다음날엔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애교 있는 딸처럼 행동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그러던 차에 문득, 한국 음식을 향한 우리의 사라이 모녀간의 유대를 돈독하게 할 뿐 아니라 엄마가 나를 인정하게 만드는 순수하고 한결같은 원천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H마트에서 울다 中

 

 

엄마와 미셸은 해마다 한 번씩 서울에 가서 6주 동안 엄마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모와 할머니, 엄마 사이에 둘러싸여 한국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떠들며 놀았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미국에서는 먹지 않는 산낙지나 간장게장을 용감하게 먹는 어린아이를 모두가 "넌 진짜 한국 사람이야."라며 기특해한다.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은 순탄치 않았지만, 용감한 아이가 되는 것은 제법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미셸은 전형적인 한국인 입맛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데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셸이 10대가 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심화된다. 좋은 대학을 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족쇄처럼 느껴지고, 자꾸만 미셸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게 신경질이 났다. 대학 진학을 앞에 두고 모녀는 서로에게 독설을 내뱉으며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아물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다 듣게 된 소식이 엄마의 배에 종양이 있다는 거였다. 미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간호하며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착한 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렇게 길지만 짧은 순간 속에서 결국 엄마는 이모의 곁으로 떠난다. 이별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그간 있었던 순간들을 모두 털어놓으며 화해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상처를 받고 죽도록 미워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어도,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것일 테니까.

 

엄마를 떠나보내고 미셸은 자신의 한국인 정체성 역시 상실될까 봐 두려워한다. 미셸의 존재와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기억해온 엄마가 없으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없다. 미셸은 영상을 통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열심히 떠올린다.

 

어느 날 뒤늦은 신혼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유일하게 남은 한국 가족인 나미 이모가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제안한다. 언어 장벽으로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해하지 못 할까 봐 망설이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모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따뜻한 방과 정성스러운 아침상을 차려준 이모를 보면서 오랜만에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 들어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이모가 말한다. "그게 핏줄이라는 거야."

 

 

내 기억을 곪아 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 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 H마트에서 울다 中

 

 

이 책 속에서는 엄마에 대한 묘사가 꽤나 다채롭고 자세하다. 애증의 관계지만 투병과 죽음을 통해서 엄마와 자신을 이어주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며 추억한다. 그의 곁에는 놀라울 만큼 한국인 입맛을 가진 미국인 남편 피터와 엄마와 연결시켜줄 수 있는 이모가 남아있기에,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가 엄마의 흔적이기에. 곁에 없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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