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집을 모은다. 유일한 취미이자 많고 많은 버릇 중 하나다. 열아홉 이맘때, 박준 작가의 시집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출판사별로 꽤 많은 수의 시집을 갖게 되었고 가끔 시집을 선물하거나 선물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시집에게 신세를 진다. 그들이 위로가 된다는 것은 뻔할 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 나에게 중요한 그들의 역할은 내 마음을 대신 풀이해 주는 것이다. 내 안의 고집쟁이가 나와는 더 이상 대화하려 하지 않을 때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다.
올해의 마지막을 기리며 한 해 동안 신세를 진 많은 시집 중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내 안의 금쪽이를 가장 완벽히 다스렸던 도서 중 하나다.
시집 <불안>은 파도시집선의 17번째 작품이다. 파도시집선과는 지난여름 부산 여행에서 우연히 들어간 독립서점 <밤산책방>에서 우연히 만났다. 파도시집선은 매번 프로젝트 형식으로 투고가 진행되며 <파도시집선 017 - 불안>에는 총 5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마음을 풀어준 많은 52개의 작품 중 가장 소개하고 싶은 글을 굳이 하나 꼽아보았다.
나는 여기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바로 뒤돌아서서 불행을 이야기할 겁니다
감정에 솔직한 것과 감정을 지어내는 건 정말로 한 끗 차이,
그래서 나는 시를 쓴다고 지어내고
나의 문장을 잔뜩 구겨서 낙태합니다
(중략)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죽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덧붙일 생각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겠습니까?
아니요,
죽어서도 살겠습니다.
- 김성원, 나의 부지런한 권태 中
위의 시를 읽으면 생각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쓰기, 사랑, 죽음과 삶 정도일 것이다.
아트인사이트의 일원이 되고자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쓰며 생각한 것이 있다. 나는 아마 특별한 사명을 타고 태어나진 않았겠지만 만약 사명이 있을 거라 착각하여 굳이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평생토록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나에게 사랑이란 나의 마음을 끝까지 글로써 표현하는 것일 테다.
문장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을 말하는 방식으로 유달리 나를 살아 있게 한다. 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마음이 불안해지면 목소리는 뒤로 숨고 글을 쓰는 것은 후순위로 밀려난다는 사실이다. 숨어버린 목소리는 대역을 세워 가식과 거짓을 지껄인다.
그 과정에서 나의 문장은 뻔뻔히 박제되었다가 흔적도 모르게 사라진다. 세상에 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문장을 생각하면 조금 슬프다.
요즘 들어 먼저 떠난 이들을 생각하면 나도 금방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체득하여 고통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죽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먼 이야기다. 당분간은, 영원을 믿지 않고도 평생을 사랑할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만 열심히 쓰려고 한다.
김성원 작가의 부지런한 권태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불안은 조급한 사람을 찾아간다. 그렇기에 작가는 불안을 회피하고자 부지런히 게을렀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와 안락을 게으름으로 치환하는 사람은 영원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의 고질병일 수도 있다.
우리는 늘 불안할 테지만 나는 다만 우리가 불안을 이기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