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 브래키에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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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첫 진화적 움직임인 <브래키에이션>이라는 제목에 달린 것치고는 많이 모순적인 한 줄의 설명을 보며 문득 폐어에 관한 오규원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 물증, 오규원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은 채 몸속에 폐를 지니고 있는 어류와 200만 년 전 처음으로 직립보행을 한 인류. 아주 오래전 진화를 멈춘 폐어와 달리 인류는 제법 최근인 30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이르렀다. 그렇게 두 발로 서며 큰 뇌를 지니고 있는 이 종은 이제 그 도약을 멈춘 것일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변화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류의 몸은 과연 진화의 끝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진화가 영영 끝나버린 것은 아닐까? <브래키에이션>은 끊임없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신체의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를 조명한다.
위로, 더 위로 향하던 진화의 대장정
공연은 줄에 걸린 옷을 무용수들이 입으며 시작된다. 무용수들이 맨몸에 끼워 넣는 갈색의 옷은 과거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갈색 털로 덮여있던 과거의 인류. 다섯 명의 인류는 가만히 멈추어서 행동을 반복하며 어딘가를 응시한다. 누군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누군가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누군가는 위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눈을 깜빡이고 누군가는 숨을 헐떡인다. 이들은 거대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천천히 무대 위를 배회한다.
아마 그 무언가는 진화의 시작이 아닐까.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며 우리가 흔히 아는 진화의 모식도가 재현된다. 바닥을 기다가 조금씩 허리를 펴가며 마침내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긴장된 표정으로 변화를 기다리던 인류는 땀을 흘리며 역동적으로 진화를 수행해 낸다. 하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원숭이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생명체들이 한 명씩 쓰러지며 끌려간다. 서로를 끌고 끌리는 움직임은 배려라기보다는 패잔병을 끌고 가는 것에 가깝다. 진도가 늦은 열등생을 기어이 다음 단계로 끌고 가려는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다.
누군가의 위에 누군가가 올라타는 식의 페어 안무는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 같았다. 아마 그 거대한 압력 앞에 혼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 타 있는 사람을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는 아랫사람. 윗사람은 대조적으로 표정이 없다. 얼굴의 소근육부터 발끝의 움직임까지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철저히 계획적이며 섬세하다. 또 다른 한 명의 무용수 위로 다른 무용수가 마치 말 위에 타 있듯 올라타 있다. 타 있는 사람과 아래에 있는 사람의 호흡이 정교하다. 부딪히지 않으면서 파도를 타듯 움직인다. 끝까지 한 몸처럼 가던 두 무용수는 아래의 '말'이 탈주하며 끝난다. 사족보행과 이족보행이 공존하고 있는 움직임이다. 인류는 위로,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인류를 타고 오른다.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침내 중력을 이겨내고 반쯤 서 있고 또 반쯤 기고 있는 무용수들 옆으로 빛이 켜진다. 그 한쪽의 빛으로 모두가 달려간다. 도착한 것은 단 한 명. 그 한 명 불빛에 얼굴에 닿을 듯 가만히 바라본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번에는 반대쪽에 불빛이 켜진다. 다시 무용수들은 반대쪽으로 달려간다. 이 불빛은 무엇일까. 진화의 동기일까.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진화라는 거대한 레이스의 상금일까. 불빛에 뛰어드는 불나방들처럼 이 불빛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무용수들은 경쟁하듯 뛰어든다. 불빛을 잡는다 한들 끝이 나지는 않는다. 정수리 위로 한참이나 남은 천장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으니.
눈동자 두 개가 화면에 등장한다. 눈동자 속에는 세계가, 몸이, 태아가 소용돌이친다. 그 눈동자는 시간의 흐름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직립보행, 그다음은?
우뚝 서는 것만으로는 높이 달린 열매를 딸 수가 없다. 무용수들은 한데 모여 하나의 높이 뻗은 나무를 형상화한다. 그 위 가장 높이 올라간 한 명의 무용수가 사과를 따려 손을 쭉 뻗는다. 주위를 짓밟고 타고 오르며 인류는 마침내 진화의 끝을 본 것일까. 다음 순간, 무대의 바닥에는 한 명의 무용수가 쓰러져있다. 진화의 낙오자다. 이 쓰러진 인류는 그 뒤에도 한참 동안 무대 왼편에 가만히 가장 낮은 위치에 붙어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그는 일어난다. 홀로 일어나서 독무를 펼친다. 좁게 시작한 날갯짓은 점점 그 속도를 더해간다. 쓰러질 것 같던 팔의 움직임은 점점 펼쳐지며 균형을 잡다가 이내 활짝 팔을 쭉 편다. 날개를 활짝 핀 생물은 그 상태로 유영한다.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무의 뒤에 이 한 문장이 쓰인다.
이것이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무용수들은 자꾸만 위를 향하려고 한다. 그 위는 미래이지만 동시에 몸을 짓누르는 중력이 다가오는 방향이기도 하다. 마침내 허리를 곧추세운 인간은 더 위를 향하기 위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나. 남은 수단은 날개뿐이다. 그래서 무용수는 마침내 날개를 활짝 핀다.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가 날개를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방황하던 것처럼 조금은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은 날개를 펼친다. 이것은 어쩌면 미래의 진화. 도무지 닿을 것 같지 않은 천장에 닿기 위해 인류는 마침내 날개를 펴고 홀로 끝에 도달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무대의 불이 켜지고 날개를 펼친 무용수 주위로 다른 무용수들이 합류한다. 이들 모두는 마치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기어다니다가, 배를 밀다가, 앉아서 엉덩이로 밀다가, 무릎으로 기다가, 조금씩 몸을 세운다. 그러고는 일어난다. 조금씩 걷는다. 그리고 뛰어서 무대 밖으로 뛰쳐나간다. 한 무용수는 끝까지 남아 무대 안을 빙빙 돌며 뛴다. 그의 거친 숨소리만 무대를 채운다.
마지막 순간이 바로 지금의 몸을 표현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몸. 진화가 지나왔던 과거도, 진화가 바라보는 미래도 아닌 지금. 작품 브래키에이션의 연출가 김혜윤은 인터뷰에서 본 작품이 진화라는 단어의 현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마지막 장은 필시 현재의 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마지막 장뿐만이 아니다. 과거의 변화했던 몸, 미래로 나아갈 몸 모두 무용수들이 표현하고 있는 '현재'의 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화는 몸이 움직인 결과일 뿐,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헉헉대고 있는 짓눌리고 있는 보이는 그대로의 몸의 움직임이다.
[윤희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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