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의 그림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겉으로는 사용된 재료나 기법, 장르를 논할 수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 그 안에 담긴 사연, 그리고 작가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의 저자 이유리는 흔히 '위대한 예술가'라 불리는 이들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탐구했다. 처음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 여겼던 예술가들이지만, 그들 역시 보편적인 감정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림은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삶과 예술,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생의 빛깔 : 제임스 휘슬러의 떨어지는 불꽃
1장 '생의 빛깔'에서는 고통과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다움과 연대의 가치를 탐구한다. 역경 속에서도 창조적 삶을 이어간 예술가들의 여정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불꽃놀이'를 떠올리면 우리는 대개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는 불꽃놀이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 지난 후, 사그라드는 불꽃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그림 속 불꽃은 어두운 배경색에 가려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보고 의아해하거나,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휘슬러의 메시지,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꺼져가는 불씨도 불꽃이듯, 우리의 삶 역시 모든 순간이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젊음도 노년도, 성취의 순간도 고요한 멈춤의 시간도, 그 자체로 소중하고 빛나는 삶의 일부다.
생의 민낯 :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던 여성들
2장 '생의 민낯'은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모순과 위선을 들여다본다.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속에 드러난 폭력, 권력, 그리고 비겁함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고대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림의 시작은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한 여성이 잠든 연인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회화의 기원이 여성이었다는 점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동안 주로 남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접해왔고, 여성은 그림 속 인물이나 모델로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용한 논문은 르네상스시기 누드 드로잉 수업에서 여성이 배제되면서 남성과 동등한 미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혔다고 분석한다.
순수 예술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공예 분야로 향했다. 하지만 자수나 바느질, 직조 분야는 우리의 삶, 특히 가사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예술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 자체가 목적인 순수 미술만이 '진짜 예술'이라는 것이다.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위대한'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그걸 호명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저자가 던진 질문을 계속 곱씹어 보게 된다.
생의 깨침 : 나, 너 그리고 우리
마지막 장 '생의 깨침'은 사랑과 자존, 존엄성 등 우리가 지켜야 할 본질적 가치를 이야기한다. 작품과 삶의 예를 통해 인간과 생명의 권리를 돌아보며, 나아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혁명가, 돌봄과 배려가 필요한 어린이의 삶, 사회 속에서 잊히기 쉬운 지적 장애인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그림들. 과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024년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놀라움을 준다. 저자는 이 작품들을 단순히 과거의 산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연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시대를 넘어선 예술의 힘과 이를 읽어내는 저자의 통찰력이 특히 매력적이다.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는 작품과 시대, 예술가의 삶을 결합하여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그림 에세이다. 그림을 통해 내면을 확장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선사할 것이니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