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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빛은 부서진 마음, 그 틈으로 온다 (p.22~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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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독일 500마르크 지폐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가 되기 이전, 독일 500마르크 화폐에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의 얼굴이 담겨있습니다. 그녀는 ‘곤충의 아버지’ 앙리 파브르보다 170여 년이나 앞서 곤충을 연구하고 그린 독일의 예술가입니다. ‘사이언스 아트’라는 분야의 개척자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업적은 ‘곤충 연구’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인생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여덟 살 연상의 화가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와 결혼합니다. 메리안은 결혼 전 집안의 영향으로 11세 때부터 동판화를 제작할 줄 알았고, 그림도 정식으로 배운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남편 그라프와 결혼하면 함께 부부 예술가로서 활동하기를 기대하며 결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라프 혼자만의 꿈이었습니다. 남편 그라프는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었고, 메리안은 생계 유지를 위해 귀족에게 자수와 스케치, 수성 및 유성 물감 사용법을 가르치고 식탁보를 만들어 귀족에게 납품하며 돈을 벌어야했습니다. 바쁜 와중에서 1675년 28세의 나이에 채색 동판화 화집 《꽃그림책》을 출간했고, 요하임 폰 산드라르트는 메리안의 그림에 대해 “그녀의 스케치와 수채화, 판화에서 엄청난 기술과 섬세함, 그리고 지성이 엿보인다”라고 극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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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서적

 

 

커리어는 나날이 발전해 갔으나, 남편 그라프는 바람을 피고 있었습니다. 메리안은, 부부관계를 다시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첫째 딸 낳은 지 10년 만에 임신하게 됩니다. 메리안이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그라프는 외도를 하며 술을 달고 사는 것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메리안은 일에 더욱 몰입하여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그 특별한 식탁》까지 출간합니다. 당시에 대중들은 진흙 웅덩이에서 생명이 저절로 생긴다는 ‘자연 발생 이론’을 믿고 있었고, 마녀가 악마의 비법으로 벌레를 만든다고 생각했으며, 나비가 ‘여름에 자연 발생되는 새’라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비과학적 믿음이 있던 시대에, 메리안이 그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곤충의 모습은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명성을 떨친 메리안은 이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아내는 남편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한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혼하기 위해 메리안은 딸들, 친정어머니 모두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향합니다.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 주 발타성에는 ‘라바디스트’라는 종교 집단이 있었는데, 남녀나 계급 구별없이 물질적 소유를 전부 포기한다면 은둔해서 살아갈 수 있는 수도원이었습니다. 남편 그라프는 네덜란드까지 쫓아와 수도원에 메리안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메리안은 수도원 내에서 지내면서 ‘남편 그라프는 라바디스트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프와 나의 결혼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에도 메리안은 계속 곤충 연구를 이어갔고, 아예 머물던 네덜란드에서 남아메리카 수리남으로 이동하여 열대림에서 곤충과 식물 기르며 표본을 제작합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을 출간하면서, 사람들의 편견이었던 ‘진흙에서 생명 태어난다, 나뭇잎이 나방으로 변한다’ 등의 생각을 뒤집게 됩니다. 심지어 6종의 식물, 9종의 나비, 2종의 풍뎅이에는 메리안의 이름도 붙여지게 됩니다.

 

어려운 결혼 생활에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대중의 비과학적인 믿음까지 바꾼 메리안의 일생에 대해 이유리 작가는 ‘용감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적으로는 몇 번이나 부서졌을지 모르지만, ‘빛은 부서진 그 틈으로 들어온다’는 말처럼 불행한 결혼 생활이 오히려 메리안에게는 성장의 동기부여가 되었을 수도 있기에.

 

 

 

사랑하라, 뜨겁게, 상처를 각오하라 (p.210~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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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부

 

 

‘오스카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영혼까지 꿰뚫어 묘사하는 ‘심리적 초상화’에 뛰어났으며, 알마 말러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 《바람의 신부(폭풍우)》로 유명합니다. 또한, 독일 히틀러 독재정권의 나치주의에 항거하는 작품 활동으로도 유명합니다. 책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에서는 그림들에 담긴 그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12년 4월 12일, 26살의 코코슈카는 7살 연상의 알마 말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알마 말러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얼마 전 사별을 한 상태였고, 알마 말러의 계부가 자신의 의붓딸 말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코코슈카에게 부탁하면서 둘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말러는 남편과 사별 이전부터 독일 유명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람을 핀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으나,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코코슈카는 말러를 사랑하게 됩니다.

 

2년의 연애 기간 동안 말러에게 400통의 편지를 보내고, 말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됩니다. 이때 말러는 코코슈카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코코슈카와 알마의 2인 초상화’를 그리면서 이를 ‘약혼 그림’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말러는 코코슈카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고, 말러는 그에게 “코코슈카 당신이 ‘완벽한 걸작’을 완성한 뒤에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코코슈카는 이에 동기부여 되어 각종 전시회에 출품할 정도의 좋은 작품을 그려냈지만, 말러는 코코슈카의 아이를 낙태해버립니다.

 

떠나가는 말러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바로 그림 ‘바람의 신부’입니다. 코코슈카는 이 그림을 보여주며 “폭풍에 날리는 휘장 끝자리에 서로 손을 잡고 누워 있는 우리의 표정은 힘차고 차분해”라고 언급했지만, 말러는 이 그림에 대해 “코코슈카는 나를 자신에 의지해 도움을 청하는 여인처럼 그렸다. 자신은 마치 온몸에서 힘을 뿜어내 거친 파도를 가라앉히는 국왕처럼 묘사했다”라고 차갑게 평했습니다.

 

말러는 코코슈카에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기병대에 입대하는 것을 권유합니다. 코코슈카는 ‘바람의 신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기병대 입대를 위한 말을 구입했고, 전선에서 총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 사이 말러는 전에 사귀었던 그로피우스와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게 됩니다.

 

코코슈카에게 이별 후유증은 오래 갔습니다. 이후 몰입할 것이 필요했는지, 독일 나치 정권에 항의하는 작품들을 만드는 데에 몰입합니다. 결국 나치에게 ‘퇴폐 작가’로 낙인 찍혀 1934년에 체코 프라하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술 감정가 ‘팔코프스카’를 만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딸 ‘올다 팔코프스카’를 만나게 되었고, 올다는 코코슈카보다 29살이나 어렸지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안정적으로 사랑합니다. 1941년에 둘은 결혼하였고, 코코슈카의 그림의 분위기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편안한 색감과 분위기를 띈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고, 스위스 제네바 호수 옆에 집을 마련하여 코코슈카는 올다와 살면서 풍경화를 그립니다.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와 이별한 직후에는 말러 닮은 인형도 공석에 동행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으나, 올다와 결혼하며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코코슈카의 가슴은 알마 말러 당신을 용서하기에”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이 사랑으로 치유됨을 잘 보여주는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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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의 이유리 작가는, 화가들의 업적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인생과 삶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잘 되도록 매끄럽게, 그리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이유리 작가의 전공이 미술인 줄 알았으나 역사를 전공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역사 전공 후 신문사 기자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어학 연수를 위해 갔던 영국에서 갤러리를 찾아다니고, 미술 서적을 읽으면서 미술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갔고,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에서 미술 칼럼 에세이스트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외에도, ‘기울어진 미술관’,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출세작’, ‘왜 유명한거야, 이 그림?’ 등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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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아이가 나비를 산책시키는 듯한 모습의 표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이지선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10년 넘게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 왔으며 현재에도 활동중입니다.

 

특히 이지선 작가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I, II’에 대한 작가노트가 인상깊었습니다.

 

 

[크기변환]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acrylic on canvas, 72.7x90.9cm, 2021.jpg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I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Where Footsteps leave no Trace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선택지를 외줄타기 하는 모험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모험과 같은 삶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럴 때 마다 나의 시선은 늘 어떠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선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풍경 너머에서 꿈처럼 흐르고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나의 그림에는 풍경, 그리고 풍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음 직한 꿈같은 풍경은 모험과 같은 삶의 표상이며 더 나은 지향점으로 나아가기 위한 삶의 태도가 반영된, 수많은 가능성들이 내재된 초월적인 품과 같은 풍경이다. 풍경 안에는 닮았지만 서로 조금씩 다른 모습의 소녀들이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녀들은 내 안의 수많은 나인 동시에 나를 거쳐 간 타인의 모습들이다. 나의 모습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타자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 결국 삶과 사람은 뒤얽혀 함께 가는 거라고 늘 되뇌게 된다.

 

삶의 모험을 지속하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연대를 향한 애정으로부터 충만한 힘이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끝에는 나와 타인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가능성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연대하는 삶의 모습들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풍경과 인물의 기록으로 되새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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