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운드트랙으로 만나 보는 애니메이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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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에게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여전히 자신이 애니메이션 마니아라고 말할 때는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 속된 말로 '오타쿠'라는 것을 고백하는 게 부끄러움을 동반한다는 뜻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칭할 때 '당신', 일본어 발음으로는 오타쿠라고 칭하는 것을 듣고 애니메이션의 광팬을 오타쿠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래 오타쿠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경멸적인 맥락은 많이 희석되었고 특정 분야에 유달리 깊은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을 아울러 '오타쿠'라 부르기도 하면서 범용성을 띤 용어가 되어가는 듯 하다.
오타쿠라는 용어에는 웬만한 팬보다 작품 세계에 깊이 공감하고 편집증적인 수집욕을 보이는 등 남다른 행동 양식을 지닌 사람들을 일컫는 뉘앙스가 여전히 남아있다. 누군가 자신을 무언가의 오타쿠라 소개했을 때 "그런 건 오타쿠가 아니다."라는 말이 돌아온다면 그는 오타쿠라는 집단의 이러한 특수성을 상당히 의식했다고 볼 수 있다.
에디터의 경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앨범 커버만 보고서는 애니메이션 OST라는 것을 추측할 수 없는 곡을 추천하는 스토리를 업로드하곤 한다. 자신의 취향을 당당하고 멋지게 전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오타쿠 기질을 용을 쓰고 숨기면서도 쉽게 눈치 채기 힘들게 오타쿠 인증을 하는 부끄럼쟁이도 있는 법이다.
사실 가끔 이러한 자신의 소심한 행보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애니메이션을 봐주기를 바라고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알량한 체면 때문에 애니메이션 OST가 얼마나 훌륭한지도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OST는 애니메이션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배경을 무시하고 듣더라도 대단한 음악이 많다.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와 세계를 이해했을 때는 더욱 풍부한 정서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작품의 이해를 돕는 안내자의 역할도 수행한다.
본 오피니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탄생하는 애니메이션 OST의 높은 완성도와 섬세한 아름다움을 전파하고자 작성되었다. 애니메이션을 반드시 보지 않더라도 애니메이션계의 클래식이라 불리는 명작, '에반게리온'과 '헌터X헌터'의 OST 중 일부를 팬의 시점에서 작성한 비평과 함께 감상해보기를 바란다. 음악만으로도 작품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진격의 거인, 에이티식스 등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음악 감독을 맡아 상당히 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사기스 시로는 에반게리온의 음악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OST는 사상 최대 판매량인 300만 장을 기록했고 작품의 유구한 인기에 힘입어 현재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 앨범은 그 자체로 명반이라 단언한다. 메카물 특유의 무게감 있는 전투를 눈앞에서 재현하는 웅장한 분위기, 성경이 모티브가 된 작품인 만큼 성스러운 희생을 애도하는 듯한 무거운 선율, 요코 타카하시의 애절하고도 선명한 음색이 자아내는 묘한 슬픔까지 아쉬운 구석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에반게리온 특유의 독보적인 분위기는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 그리고 사기스 시로의 합작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Thanatos]
에반게리온의 음악을 떠올려보라고 요청하면, 많은 이들이 아스카가 혈혈단신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씬 뒤로 바흐 G선상의 아리아가 부드럽게 흐르는 부분을 떠올릴 것이다. 암담한 전개와 대조되는 발랄한 선율의 음악을 활용해 장면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려는 이 시도는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인상을 남겼다.
G선상의 아리아가 인상적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에반게리온을 대표하는 사운드트랙을 고르라고 한다면 에디터는 'Thanatos'를 꼽아보려 한다. 타나토스는 그리스 신화 속 죽음의 신이며 프로이트는 이를 자해나 타인을 해치는 방향으로 표현되는 생명 제거의 충동이라 칭했다. 이러한 제목처럼 'Thanatos'는 불가해한 자기파괴적인 충동을 묘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죽음의 신이 찾아오는 과정을 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정한 박자로 연주되는 투박한 피아노 반주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며, 느린 속도로 연주하는 여러 대의 바이올린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점차 고조시킨다. 잠시 바이올린 소리가 잦아들고 심장 박동 같은 드럼 소리에 맞춰 높은 음의 멜로디가 전개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른다.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절망이 발산되고 생명을 거둔 타나토스는 자리를 뜬다.
*예감
'잔혹한 천사의 테제'가 요코 타카하시의 보컬로 메카물로서 에반게리온의 힘찬 시작을 알렸다면, '예감'은 에반게리온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상처를 그려내는 동시에 이를 치유해주기보다는 이들을 지독히 외로운 개인으로 끝까지 남겨두는 전개와 관련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인물이 내면에 고립되면서 분위기는 오히려 붕 뜨게 되고 이로 인해 불가해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요코 타카하시의 맑은 음성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순진하고도 솔직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쓸쓸함에 익숙했는데, 어느날 무심코 자신에게 손을 내민 '그대'를 보고 찬란한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도 그를 밀어내거나 거부하고 싶지 않다. 마음에는 빛이 흘러 넘칠 정도로 환희를 느끼고 있다.
'예감'을 듣고 있으면 요코 타카하시가 에반게리온 OST에 참여한 이유를 느낄 수 있다. 가사는 마냥 달콤하지만, 청아하면서도 서글픈 목소리 사이 사이 외로움이 들린다. 어딘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도 애써 외면해버리고 싶은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감'은 이렇게 당장 사랑과 영원을 바라는 꿈결 같은 순간에 있으면서도 변한 사랑에 금새 체념해버릴 듯, 외로운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에반게리온을 표현한다.
헌터X헌터 사운드트랙
점프의 소년 만화 중 빼어난 연출의 귀감이 되는 작품으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헌터X헌터'는 오랜 연재 중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터운 팬층을 자랑한다. 특히 애니메이션 리메이크 버전의 4부부터 6부에 해당하는 '개미 편'은 특히 높은 몰입도를 자랑하는 회차로 그 OST 또한 일품이다.
'개미'는 헌터X헌터 세계관에서 상당히 위험한 생물로 분류된다. 여왕 개미는 포식한 생물의 유전자와 개미 유전자를 조합해 여러 형질을 지닌 개미를 낳는, 이른바 섭식 번식을 하는데 인간의 지성을 갖춘 개미가 탄생하면서 헌터들이 인류에 닥친 위험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개미 편의 핵심 줄거리다. 상당한 강적과의 배틀인 만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긴장감을 끌고 가는 데 BGM이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다.
이어 소개할 재현한 헌터X헌터 OST는 태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음원과 흡사한 수준으로 재현한 공연 영상으로 즐겨보길 바란다. 소개하는 OST 외의 나머지 5곡 또한 헌터X헌터의 웅장한 세계관을 음악으로 고스란히 옮긴 수작이므로 감상해보는 걸 추천한다.
영상의 맨 처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은 'Kingdom of Predators', 직역하면 포식자의 왕국이라는 곡이다. 여기서 말하는 포식자는 개미를 의미하며 개미 특유의 잔혹성과 인간을 식량과 병사로 길들이려는 개미 왕의 위험한 야망을 표현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큰 드럼 소리와 함께 여러 악기들이 내는 불협화음이 단번에 긴장감을 끌어올리면, 여러 대의 바이올린이 서정적인 멜로디를 합주하기 시작한다. 트럼펫과 호른이 중간 중간 불길한 전조를 암시하는 멜로디를 연주하면서 소리의 입체감을 더하고 여러 악기 소리가 한데 엉키며 소리는 점점 커진다. 점차 가까워지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힘과 살의에 생존 본능을 강하게 느끼는 동시에 더 큰 긴장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심벌즈가 두 차례의 클라이막스를 알리며 포식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공포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듯 느린 첼로 연주와 피아노 반주가 끝을 알린다.
영상의 14분 12초부터 시작되는 'In the Palace (Agitato)'는 'Kingdom of Predators'이 주는 인상만큼이나 헌터X헌터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곡이다. 이는 개미 왕의 친위대 중 한 명인 '샤와프후'가 등장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다.
이 곡에서 눈에 띄는 점은 Agitato, 격렬하게 연주하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는 왕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감정 기복이 잦은 그의 감정적인 성격을 연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가 왕을 보좌하는 친위대 중 육탄전보다 머리를 쓰는 것을 선호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예술을 즐기는 감수성도 지녔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곡에 대한 이해가 어렵지 않다.
빠른 템포로 곡을 여는 바이올린 독주를 마치 프후가 흥분에 겨워 곡을 연주한 것처럼 연출한 씬도 있는데, 'In the Palace'는 이와 같이 샤와프후의 성격과 광기에 가까운 그의 충성심을 함께 보여준다. 해당 곡은 'Kingdom of Predators'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시작하는데, 짧은 바이올린 독주 후 점점 커지는 북소리에 맞춰 웅장한 합창이 장송가처럼 울려퍼진다. 평소에는 지적이고 예민한 인물처럼 보이나 왕의 안위를 걱정하는 불안이 격정의 감정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이성을 잃는 캐릭터성을 표현한 듯하다.
여러 차례의 심벌즈 소리에 이어, 빠르게 전개되는 바이올린 합주가 북소리와 함께 잦아들면, 1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내에 한 인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예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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