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lly] Epilogue. 마음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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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lyfish Monologue}
Epilogue. 마음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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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하는, 가까운 것을 모호하게 이야기하기.
‘마음‘을 발음해본다. 마-음-. 무언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린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 우리는 종종 '나'를 '마음'이라 부르곤 한다. “내 마음은 그래, 나는 그래”하면서. 나와 마음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평범한 일상이 있다.
한편 사람과 마음은 한 몸 같다. 마음은 사람에 존재하니까. 살아있으니까 마음이 있고, 사람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마음은 사람의 필수 구성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마치 없으면 죽는 심장처럼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마음이다'라고 말해본다. 나는 마음이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어색한 문장 같다. 나는… 마음이다? 정말 그럴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나는 마음이 아닌가, 이 문장도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또 다른 한편. 사람과 마음은 꼭 한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삶의 순간에는 사람과 마음이 각각 존재하기도 한다. 마음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지만 마음을 남기고 간 사람이 있다. 냉장고에 붙인 손 글씨 메모, 무심히 곁에 있던 손 떼 묻은 물건부터 집요한 몸짓 끝에 완성된 예술 작품까지. 거기엔 얇은 단상부터 깊은 영원까지, 다채로운 형태의 마음이 담긴다. 그렇게 마음은 사람 없이도 살아남는다.
마음을 잃은 사람은 남겨진 마음을 만나 제 마음을 되찾기도 한다. 타인의 진심을 읽으며 잊혔던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감정을 마주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낯선 마음과의 조우를 통해 생존할 힘을 얻어왔다. 여러모로 온전치 못해 어설프게 유지하는 마음을 끌어안고서 마음을 잃고, 마음을 남기고, 마음을 겨우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삶이 여태 그렇게 살아있다고 믿는다.
나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기묘한 독립성이 있다. 적막 속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주변에 남겨진 마음을 돌아볼 때 느껴지는 묘한 감정,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은 이 독립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 느낌은 일종의 낯섦이다. 한 몸처럼 가장 가깝고 당연했던 무언가들이 낯설어지는 조우,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한 마음과 마음 사이의 비밀스러운 영역. 그런 것이 우리들 사이에 가득하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마음속 내면의 일은 각자의 언어로서만 증명되고 서술될 것이다. 다채로운 증언이 공존하는 가운데에는 벅찬 공감이 흐를 수도 있고, 전혀 어긋난 오해도 일어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과 충돌 속에 모두가 있지만, 이 ‘내면의 일’이라는 두루뭉술하고도 분명한 존재는 영영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유한 삶의 경험에 따라 자물쇠 채우며 켜켜이 덧대어진 영혼의 문들, 그 안쪽에 머무를 때 온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언어를 동원해도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는 내면의 일은, 표현되지 않을 때 가장 오롯이 존재할 것이다*.
*가령 어떤 마음 상태를 ‘슬픔‘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상태를 구성하는 또다른 감정들이 쉽게 지워질 것이다. 또한 내가 발화한 ’슬픔‘은 각자가 가진 ’슬픔‘의 의미로 읽히며 다양한 의미로 흩어질 것이다. 발화된 마음이 앞서 말한 독립성을 지니고 세상 곳곳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발화된 마음을 조우한 사람들은 각자가 지닌 마음의 언어로, 어디선가 나타난 낯선 마음을 살펴볼 것이고 그것을 계기로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거나 지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공존이 넓은 의미로서의 예술(무언가를 표현하고 발화하기)이 생동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여느 글에서도 지겹도록 말했지만, 예술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이고 인간이 살아있는 한 예술이 존재할 거라고 믿는다.
사유가 거기까지 가닿자, ‘은신함으로써 온전한 내면’이란 것이 궁금해졌다. 가장 가깝지만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비밀이 내게, 그리고 모두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분명히 느낄 수 있지만 아주 깊숙이 감춰진 그 세계에 나를 이해할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특정한 상황이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곤 하는 영혼의 고유함, 그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고픈 마음으로 살아왔던 나는 은신한 마음을 집요하게 살펴보고 싶었다. 그런 욕심 한편으론 내면이 존재하는 방식, 숨어있는 그대로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내면을 해체하거나 관망하는 대신, 내면의 안쪽과 바깥을 오갔다. 아주 깊숙이 숨어들어 가기도 하고, 내면을 읽어보려고 바깥으로 나와 거리를 두어 앉아보기도 했다(여태까지는 전자를 더 많이 해온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안에 품은 마음'과 '마음에 품어진 나'를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마음과 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계의 다채로운 풍경을 상상하게 된 것이다.
‘내 안에 품은 마음은’ 보다 일상적인 감각이기에 나의 창작은 ‘나를 품은 마음’을 향했다. 이를 위해 마음을 몸에서 꺼내 '내 눈앞에' 두었다(물론 상상의 감각이다). 그렇게 한다면 ‘마음’은 어떻게 나타날까(나는 내 마음을 어떤 이미지로 여기고 있을까), 거기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내 마음이 주로 떠올리고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런 마음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추측이나 느낌을 어떻게 목격하고 또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물음을 안고서 두루뭉술한 배회를 시작했다.
작년에는 우울이 가장 밝게 빛나는 정원을 보았다. 까만 것이 환하다는 어긋난 감각을 품고서 수풀처럼 무성히 자라난 감정을 살펴봤었다. 그에 이어 이번엔 한 편의 바다, 해파리를 본 것이다. 이 그늘진 푸른빛 세계는 정원보다 훨씬 난해한 것이었다. 우울의 정원은 내가 마음 ‘속’에 머무르며 쓴 이야기였다. '마음의 세계 속에 있는 나'라는 관계를 유지하며 이뤄진 연속된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음을 품은 동시에 마음이 나를 품은’ 상태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니까 마음이 ‘내가 품은 감정, 이미지 등으로 구성된 세상‘과, 그 세상 속에 머무르는 ‘나’가 동시에 된 것이다. 심지어 그 마음을 이야기할 ‘나‘는 '몽상가'(내면에 위치한 관념적 자아)를 경유해서 해파리의 내면에 안착했다. 안과 밖이라는 위치 간의 경계를 지워내고, 마음속의 마음속에서 존재함의 감각을 헤아려보기로 한 것이다.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조차 막연한 '마음속의 마음속'. 거기 앉은 내가 거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흐르고 승화하는 내면의 일을 응시하고 궁금해하기. 해명하기 어렵지만 존재감만큼은 선명한 마음을 읊어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내면을 응시했다. 불가피하게 자의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어떻게 보여질지 모를 두려움도 안고서 그 은밀한 차원의 관찰기를 조금씩 써 내려갔다.
겨우 붙잡은 감정의 끄트머리, 허연 입김 같은 마음을 일련의 상징으로 치환해 써 내려가는 매시간이 꿈 같았다. 드문드문 끊어진 장면들로만 기억에 남아버린 꿈. 피부에 섬뜩한 감각만 남긴 채 기억은 모조리 지우고 사라진 꿈. 그런 꿈 같은 시간. 처음에는 무얼 잡아야 하는지 모르는 술래처럼 숨바꼭질을 한 것 같다. 잡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내가 완전히 붙잡고 고정할 수 있는 마음이란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후에는 숲에 덩그러니 남은 채집자처럼 내게 나타난 희미한 마음을 그저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우연을 각별히 여기게 되었고, 우연을 마주치는 낯선 발견을 고대하면서 꾸준히 움직여 온 것이다.
불확실한 감각과 망설이는 언어를 매만지면서 불안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국엔 무언가를 알아낼 거란 어렴풋한 확신이 내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희미하게 흩날리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여린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관한 것을 계속 쓰고 그렸다. 무엇이 남겨지고 있는지, 또 남겨질 수 있는지 모른 채 수많은 것들을 쓰고 지웠다.
막상 마주한 마음은 생각보다 더 비밀이 많고, 제멋대로인 탓에 방황할 때가 많았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은 나를 심란하게 했고, 그 심란함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Jellyfish Monologue}는 마음을 살펴보는 와중에 일어난 심란한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한 독백을 기록한 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내 글들이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될 때가 많았다. '글의 수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글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가끔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서 안 그래도 혼자 남아있는 자리에서 더 고립을 자처하기도 했다.
사실 '심란함'은 굳이 언급하기 새삼스러울 정도로 내가 평소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나 자체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심란한 마음을 그저 ‘불안‘이라고 부르며 그 정체를 늘 궁금해했었는데, 이번에 연재를 하며 그 정체를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저마다의 이유로 내면에 응어리진 채 남겨졌던 마음의 잔해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살아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남겨진 불순물 혹은 미확인 물질. 진작 밖에다 훌훌 털어버려야 했는데, 이 잔해들을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앓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나의 창작 행위는 이 심란함과 통증을 원동력 삼아 이어져 온 것일 테다.
돌아보니 여태 마음을 읽고 기록하는 동안 잔해들을 조금씩 밖으로 내보내 준 것 같다. 너저분했던 마음에 정돈된 빈자리가 생겨난 것이다. 가을 즈음, 문득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을 지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에 숨어들어 갈 몽상만 바라봤는데, 서서히 뒤돌아서 바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마음속에 희끄무레하게 뭉쳐있던 이야기를 애써 끄집어냈다면, 지금은 한 순간에 덩그러니 놓인 나에게 닿은 은근한 것들에 눈길이 간다. 바람의 온도, 계절의 변화, 우연히 만난 물까치, 먹고 싶었던 무화과 타르트, 창문 모양으로 반듯이 떨어지는 햇빛. 내게 찾아온 미세한 존재감이 차분하게 이뤄내는 작은 기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꼭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다. 습관이었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내게 이처럼 가벼운 삶의 태도는 처음이고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무척 반갑다. 우울한 시간이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지만, 가벼운 마음을 느껴보았으니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가벼움에 대한 기억을 보다 더 단단해진 마음의 증거로 여긴다. 아주 굳세지는 못하지만, 삶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마음. 그런 마음,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본다.
이 기록을 남기는 지금, 나는 마음의 바깥에 있다. 아득하고 거대한 세상 같았던 마음은 투명한 유리 덮개를 덮어둔 테라리움처럼 되어 내 곁에 놓였다. 나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마음에 기대어 앉아 있다. 당분간은 멀리 걸어 나갈 생각이 없다. 이 자리에서만 살필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 머무르기로 했다. 물론 이따금 고개를 돌려 마음이 잘 있는지 확인해 준다. ‘까만빛’을 말하고 ‘가라앉는 시간‘을 말하며 환한 낮에도 어둑한 시간 속을 헤맸는데, 지금은 바깥에서 햇빛을 덩그러니 맞는다. 자그마한 씨앗 모양으로, 햇빛의 손길을 따라 생애의 기쁨을 더듬어본다.
나보다 커다랬던 마음의 세계를 작은 호주머니에 담는 상상을 해본다. 주머니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도사리고 있을 텐데, 그중 해파리의 꿈을 꾸며 수집한 네 개의 젤리들이 가장 영롱할 것이다. 이따금 젤리들을 꺼내 손에 담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손끝으로 굴려볼 것이다. 끝맛이 조금 씁쓸한 소금 냄새가 날 테고, 입에 넣으면 이상하게 달콤하고 차가운 맛 날 거라고 상상해볼 것이다. 요 젤리들을 햇빛 아래서 보면 더 반짝일까. 그럴 것 같다. 그 반짝임을 바라보다 보면 마음에 관한 새로운 비밀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여간 바깥에서도 마음을 향한 호기심은 멈출 줄 모를 예정이다.
그래서 내가 늘 해오던, 가장 가까운 것을 모호하게 이야기하기는 계속될 것이다.
반짝이는 곁. 나는 다시 가장 가깝고도 낯선 세계로 나아간다.
[오예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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