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명작 동화 백스테이지 투어 -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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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보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읽었던 공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표현이 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각각의 이야기가 가진 우여곡절, 기승전은 달라도 끝은 해당 멘트가 나오며 열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동화라는 것 자체가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 바람직한 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작과 전개는 어떠한가. 공주가 존재하고 어떠한 사건을 통해 왕자를 만난다. 공간적 배경은 공주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왕자는 사실상 외부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동화 속 왕자는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이것이 박신영 작가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바이다.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친근하게 보았던 문학작품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동양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채 책 속에서 영국, 독일, 미국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특정 집단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간혹 우리는 왕족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한다. 혼기를 앞두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란 딸이 있는 왕/왕비 혹은 그 주인공 공주가 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주체적으로 옮기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책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에서 작가 박신영은 그의 눈으로 발견한 명작의 문장들 속에 숨겨진 세계사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중고교 시절 만난 역사 선생님처럼 '재미있게 읽다보면 역사 흐름이 이해되는 책!'을 무려 2013년에 현실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출간 이후 10년 동안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리커버 에디션으로 찾아왔다. 백마 탄 왕자가 오르는 언덕 아래 무지갯빛 하늘은 책장을 열면 펼쳐질 흥미진진한 역사를 기대하게 한다.
모든 학문에는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있다. 어떤 학문은 생각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에, 어떤 학문은 실용적이라 배움에 즐거움을 느낀다. 역사는 후대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기록된 사실을 배운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힘을 키워준다고 생각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듣듯이 공부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벅찬 현대인들에게 과거에 대해 알아보는 역사는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역사가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2013년 초판 서문에 있는 문장을 읽으며 '이 책을 끝까지 재밌게 읽겠구나' 싶었다.
역사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었다. 케케묵은 시절의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정 불변의 과거사란 없다. 역사를 보고 평가하는 시각을 보면 그 사람의 현재 이해관계가 얽힌 입장이 명확히 보이기 때문에 역사는 매우 실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9쪽, 초판 서문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이 책은 '다른 이야기 다른 역사 시리즈'의 시작이 되는 책이다. 본 책인 1권은 서양사를 다루고 있고, 2권에서는 서양사를 심화적으로 다루며, 예정된 3-5부는 각각 동양사, 한국사, 여성사를 이야기한다. 책 뒤쪽 날개에 이미 출간되어 리커버 에디션으로 새롭게 단장한 1권, 2권 옆으로 세 권의 출간 예정 책들의 실루엣을 보며 영화 <아바타> 시리즈의 기대감과 비슷한 떨림을 느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필자는 책이 배송되는 동안 매력적인 제목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2013년 초판본으로 먼저 읽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악당, 조연, 그리고 마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1부 첫 이야기로 소개되는 것이 바로 책의 제목인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 책 속에서 장남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을 때 바로 <겨울왕국>이 생각났다.
이것을 책 리뷰에 적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2019년 개정 증보된 후 리커버 에디션으로 나온 이번 책을 받았다. 남은 부분을 읽다가 재밌게도 작가님이 이미 책 본문에 <겨울왕국>을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문학과 역사를 사랑하는 분이 놓치실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에 잠시 웃었다. <겨울왕국>의 한스 왕자는 정말 작가님이 이야기한 '전형적으로 떠돌아다니는 백마 탄 왕자'의 전형이다. 12명의 형이 있는 막내에게 왕위 계승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다.
책은 '아는 만큼 보인다'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각 장마다 다루고 있는 문학 작품은 빨간 모자, 헨젤과 그레텔, 빨간 머리 앤, 백설 공주,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돈키호테, 삼총사, 해리포터, 레 미제라블, 플랜더스의 개 등 모두 살면서 한 번쯤 들어본 제목들이다. 제목만큼 익숙한 내용들이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홍당무'라고 놀리는 길버트, 해리 포터 시리즈의 첫 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마법사의 돌'을 손에 넣은 해리처럼 말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야기가 준 정보만으로 내용을 받아들이지만, 박신영 작가는 같은 내용을 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대의 맥락에서 파악한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은 길버트가 머리색을 놀린 것에 화를 낼 뿐만 아니라, 성분을 알 수 없는 염색약으로 사용해서 초록색이 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소동도 벌인다. 앤 또한 자기 머리카락 색깔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여기서 왜 붉은 머리는 놀림의 대상이 되고, 본인조차 싫어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게 역사로 보는 문학의 시작점이다.
여기에는 검은 머리가 다수인 동양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편견이 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편견이 생겼을까. 편견의 기반에는 중세 기독교인들이 생명체의 빨간 피를 닮은 빨간 수염과 머리카락이 과도한 성적 에너지를 의미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빨간 머리카락과 빨간 수염은 성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여섯 명의 아내와 결혼한 '헨리 8세'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빨간 머리카락이 근거 없는 믿음에 힘을 실었다.
편견을 형성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빨간 머리는 심지어 마녀로 몰린 역사도 있다. 유럽을 구성하는 3대 민족 중 하나인 게르만족은 흰 피부와 금발에 푸른 눈을 이상적 외모로 여겼다. 빨간 머리는 매우 드물게 보이는 유전형질이며, 게르만족이 몰아낸 고대 유럽 원주민인 켈트족에게 흔한 머리카락 색깔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감 잡을 수 있다. 빨간 머리 편견 아래에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박해가 깔려있는 것이다. 갈색 눈이 다수인 남부 유럽에서는 반대로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마녀로 몰렸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필자는 작년에 미국에서 함께 일하면서 만난 빨간 머리 친구 '케이트'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생강색'이라고 말했다. 다른 많은 친구처럼 케이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사랑하며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시도했고, 친구들은 그의 머리카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강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야(You are my favorite ginger)"라고 말하곤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낯설게만 느껴졌는데 언젠가부터 이 말이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져 필자 또한 자주 말하고는 했다.
이처럼 편견이 있던 과거를 지나 시대가 공유하는 생각은 변화한다. 앤은 가난한 고아이고, 여자이고, 빨간 머리인, 당시 시선으로 보기에는 악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앤이 가진 내적인 아름다움은 기존 동화에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하던 기준에 맞춘 어떤 주인공들보다 지금까지 소녀들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또 한 명의 빨간 머리 소녀, <말괄량이 삐삐>에 등장하는 삐삐의 씩씩하고 강인한 모습까지 더해져 더 이상 빨간 머리는 마녀가 아닌 주체적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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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알고 싶다는 욕심으로 영화, 책, 공연 등으로 새로운 인물들의 삶을 엿보는 것을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다. 매일 또 새로운 이야기를 탐하며 살다가, 요즘에 하나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또 다른 즐거움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과연 지금껏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들으면서 무엇을 받아들였는지 생각해본다. 이야기가 생겨난 맥락 속에서 온전히 파악하기보다는 접한 이야기의 양에 더 집중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의 이야기에 대해 분석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본 적은 언제인지 싶다. 책의 마지막 장은 '신데렐라'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디즈니 신데렐라 이전에 독일의 그림 형제가 정리한 <아셴푸틀>이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상징과도 같은 유리 구두와 주문을 외는 요정 대모가 나오지 않는 이 작품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근대 이전 유럽 성장기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장담이다. 아셴푸틀처럼 신데렐라의 모티프를 가진 다양한 이야기가 시대와 지역의 차이를 두고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도 깊이 들어가면 발견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진다.
동화 속 인물들은 갑자기 마술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명작 속 인물 하나는 한 시대의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를 읽으며 배웠다. 아이들을 위해 지어진 동화도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금증을 갖는 태도와 그 시대를 들려줄 역사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믿지 않았던, 동화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어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서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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