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블러드차일드, 사랑의 잔혹동화를 쓰다 [도서/문학]

남성 임신을 통해 낭만적 사랑의 의미를 고찰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차일드'(1984)
글 입력 2024.11.3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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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믿음은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대개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동전에도 양면이 있고 칼에도 양날이 있듯이 사랑에도 분명 양면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랑의 양면성을 첨예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소설 「블러드차일드」(1984)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 이 소설은 사랑의 행동으로 임신을 하게 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간’은 자신의 미래가 될 끔찍한 출산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상위의 존재인 ‘트가토이’를 향한 애정으로 결국 임신을 선택한다. 작가는 어떤 어려운 선택도 기꺼이 하게 만드는 사랑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사랑과 그로 인한 희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공생의 세계관


 

인간 독자의 관점에서 「블러드차일드」는 굉장히 불쾌한 소설이다. 현실에서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소설에서는 외계 생명체 틀릭의 통제 아래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과거 테란은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사육당하며 틀릭의 알을 낳는 데 강제로 동원됐다. 그나마 틀릭에게 인간 취급을 받는 지금도 테란은 보호의 대가로 틀릭의 숙주가 되어 그들의 아이들을 대신 낳아줘야 한다.

 

출산 과정도 끔찍하다. 테란은 수족이 수십 개 달린 거대 곤충의 모습을 한 틀릭의 알을 몸속에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절개를 통해 유충을 꺼낸다. 시기를 놓쳐 유충이 테란의 살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면 테란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위험을 감수하고 테란은 일생에 몇 번의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다.

 

언뜻 보면 모든 상황이 테란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지만, 테란은 틀릭의 횡포에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피해자가 아니다. 틀릭과 테란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틀릭에게 테란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의 터전에 침입한 이방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쫓아내거나 부려먹을 수 있는 생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짐승보다 테란의 몸이 틀릭의 자손을 낳는 데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공존의 방식을 모색했다.

 

틀릭이 테란에게 보호구역과 무정란을 제공하고, 테란이 틀릭의 아이들을 낳아주는 것은 일종의 타협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조금씩 내어줌으로써 한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신체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감당하는 건 오로지 테란의 몫이나,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테란이 틀릭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것은 필연적이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랑의 힘


 

틀릭과 테란의 공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다. 보호와 출산의 상호교환은 처음엔 딱딱한 계약으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분명 애정의 힘에 기대어 이뤄진다. 엔틀릭인 '브렘 로마스'의 출산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로마스는 자기 몸속에서 알을 까고 나오는 유충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을 임신시킨 트콧기프의 이름을 간절히 외친다. 출산 현장에 뒤늦게 도착해 로마스의 상태를 묻는 트콧기프의 목소리에도 로마스를 향한 걱정이 묻어 있다.

 

간은 로마스의 출산에 참여하면서 이렇게 틀릭과 엔틀릭 사이에 작용하는 사랑을 느끼지만, 동시에 엔틀릭의 출산 과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참혹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유충의 알껍데기에 묻어 있는 테란의 피를 핥아 먹는 트가토이를 보면서 모든 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 경험으로 간은 트가토이의 엔틀릭이 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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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출산의 끔찍한 장면을 낱낱이 목격하고도 결국 임신을 결심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아무리 트가토이가 오래전에 간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간에게는 임신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고, 트가토이도 이를 존중했다. 그러나 간은 자기 누나에게 가려는 트가토이를 불러세워 자신의 몸속에 산란하라고 말한다. 트가토이를 제 것으로 두고 싶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예정된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도 그는 트가토이의 수족을 편안하게 느끼고 그의 움직임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에 온전히 귀를 기울인 것이다.

 

이러한 간의 결정은 트가토이가 총으로 자신을 위협하던 간이 자기 아이들을 잘 품어줄 거라는 믿음을 갖는 계기가 된다. 트가토이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간에게 트가토이는 돌봄을 약속하고, 그렇게 두 존재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합일을 이루는 결말을 맞는다.

 

 

 

사랑은 과연 주체적인가


 

틀릭과 테란은 공생하며, 간은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 임신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태어난 지 삼 분 만에 트가토이의 선택을 받아 오랫동안 그에게 길들여진 상태로 느끼는 사랑을 과연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진 것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이방인이 행성의 주인에게 품는 마음이 정말 자발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자를 대신해 이러한 의심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소설 속 인물이 바로 간의 형인 ‘퀴’다. 늦은 입양과 이른 나이에 목격한 엔틀릭의 죽음으로 틀릭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퀴는 공생이라 여겨지는 틀릭과 테란의 관계에서 권력의 불균형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는 틀릭의 자손을 낳는 것이 단순히 그들의 숙주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간을 향해 콧방귀를 놓는다. 그러면서 틀릭의 편을 드는 간이 트가토이의 소유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간의 사랑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속 여성의 사랑에 대한 비유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인을 선택함으로써 종속에 참여하는 것은 종종 자유 선택에 대한 환상을 주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은 배후의 동기 없이 사랑을 선택할 만큼 절대 자유롭지 않다. 현재 그녀에게는 사랑과 지위라는 두 가지 사안이 불가분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과 여성은 각각 경제적 책임과 가사의 책임을 나눠지며 공생해 왔지만, 이는 결국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동안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온 여성에게 자유롭고 순수한 사랑은 너무나 먼 얘기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의 사랑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에바 일루즈가 주장한 것처럼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은 권력관계를 보호관계로 바꿔주며, ‘자연스러운’ 상호의존성과 강한 감정적 접착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간이 저보다 상위의 존재인 트가토이의 보호를 받으며 그에게 사랑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신화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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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를 읽으며 낸시 밋포드의 소설 『Pursuit of Love』를 원작으로 하는 영국 BBC 시리즈 〈린다의 가장 완벽한 5개월〉이 떠올랐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욕망하는 린다는 사랑하는 남자들을 위해 헌신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린다를 보며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린다. 극도로 로맨틱한 성격은 여자에게 치명적이야. 저항할 수 없게 만들거든. 다행인 건 여자들이 사실은 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었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여성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자발적으로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온갖 고통과 차별, 불합리를 경험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을 쏟아부었다. 인류가 세대를 거듭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이 지금의 모습을 하는 것도 전부 그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러드차일드」도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잔혹동화다. 아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소설은 사랑이 그리 평등하게 이뤄지지 않으며 별로 아름답지도 않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이 부질없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사랑으로 트가토이의 알을 임신한 간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소중한 약속을 통해 문화를 바꾸고 행성의 평화를 이어갈 두 존재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잔혹하지만 여전히 동화적인 소설 속 세계는 바로 이 순간에도 변할 듯 변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굴러가고 있는 우리의 세상을 닮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에 속고 사랑을 속이도록 만들어져 왔고 이제 그러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었지만, 지구라는 행성에 완벽한 평등이 찾아오는 그날까지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말을 단 한 차례도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사랑의 양면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블러드차일드」는 매우 놀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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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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