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 - 2024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

2024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일리야 슈무클러가 선사한 건반 위 여행
글 입력 2024.11.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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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 포스터.jpg

 

 

11월 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부드러우면서도 폭발적인 선율이 가득 흘러넘쳤다. 그 선율의 주인은 2024 게자안다 콩쿠르의 우승자인 일리야 슈무클러였다. 모스크바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그는 한국으로 치자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2살에 첫 독주회를 열었고, 14살에는 오케스트라 데뷔 후 유럽과 북미에서 솔로 공연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첫 한국 공연이었다.

 

일리야 슈무클러에게도 이 공연은 처음이겠지만, 그곳에 자리한 적지 않은 사람들 또한 이런 공연이 처음일 것이었다. 나 또한 같은 입장이라 오묘한 설렘이 있었다. 그렇게 인생 첫 피아노 리사이틀을 국제 콩쿠르 우승자의 연주로 들을 수 있다는 영광을 안고 좌석에 앉자, 무대 위 고요하게 빛나고 있는 핀 라이트 아래에서 생동감 넘치는 음률이 흘러나왔다.

 

Program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토카타 D장조, BWV912

프란츠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13번 A장조, D.664 (Op.posth.120)

프란츠 리스트 -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S.173’ 중 7번 장송곡

 

-Intermission-

 

클로드 드뷔시 - 영상 1집, L.110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 전람회의 그림

 

프로그램은 총 5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반부는 바흐의 토카타 D 장조, BWV912로 시작해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3번 A장조, D.664로 이어졌는데, 물 흐르듯 부드럽고 섬세한 선율이 감각을 일깨우듯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유연하게 이어지는 일리야 슈무클러의 손길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강렬하진 않지만 감미롭고 가볍게 들려왔다.

 

느낀 점을 그대로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분 좋은 카페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평화로운 오후 편안한 냄새가 나는 소파에 앉아 카페라테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보통 일상에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장소를 떠올려 보라 한다면 우아한 곡조가 흐르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나 재즈 피아노가 흐르는 칵테일바 정도를 생각할 텐데, 일리야 슈무클러가 연주하는 이 두 곡조에는 묘한 포근함이 있었다.

 

그렇게 잠시의 여유와 낭만을 즐긴 뒤 찾아온 건 장렬한 장송곡이었다. 1849년 헝가리 봉기 실패로 고통받던 자신의 친구들에게 리스트가 헌사한 이 곡에서 일리야 슈무클러는 그 이름과 의미에 걸맞게 첫 음표부터 묵직하게 찍어 누르며 직전의 여유를 없애고 스릴을 더해주었다. 음 하나하나에 거대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으며, 잠깐의 공백에도 강하게 찍어 누른 음의 잔음이 이어지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개인적으로 프로그램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중반부의 고요한 낙엽 같은 음률도, 묵직한 저음부와 별안간 몰아치는 에너지의 흐름도 완벽하게 취향에 들어맞았다. 중후반부부터는 왼손 반주가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데 바쁘게 움직이는 일리야 슈무클러의 양손을 보자 그 먼 거리에서도 그의 열정과 건반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이 보이는 듯했다. 그 몸짓과 더불어 정확하면서도 깊게 눌린 건반에서는 폭발적인 시너지가 났다.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현장감의 여운이 느껴졌다. 직전까지 느껴졌던 울림이 사라지자, 약간의 공허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잠시 한산해진 공연장 속에서 작게 복작거리는 소리가 금세 그런 마음을 채워주었다. 아마 현장 공연의 매력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라고 이즈음에 확신했었다.

   

이후 이어지는 작품은 드뷔시의 영상 1집, L.110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인상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드뷔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인 ‘물의 반영’에서는 오묘하게 이어지는 불투명한 화음들이 명확히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는데, 이는 두 번째 작품 ‘라모를 찬양하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일리야 슈무클러의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력이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움직임’은 마치 영상이 빠르게 되감겼다가 느리게 재생되는 듯한 흐름이 특징적이었는데 일리야 슈무클러는 움직이는 것만이 갖고 있는 불규칙한 리듬과 스피드,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뛰어난 리듬감을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제일 긴 구간을 차지한 작품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일리야 슈무클러는 무려 열 개의 이야기와 네 번의 프렐류드로 구성된 이 작품을 그 긴 시간 동안 소화하며 끝까지 열정을 쏟아부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리야 슈무클러의 손끝에서 관객들은 피아노가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넓혀갈 수 있었다. 어렵고도 복잡하며,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한 곡이라는 게 피아노를 잘 모르는 나에게도 여실하게 느껴졌는데, 무대 위 일리야 슈무클러는 그러한 어려움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소화하며 웅장하게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었다. 마지막 3분가량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함과 영롱함을 느낄 수 있는데, 최종장의 끝에서 터치 하나하나 에너지를 담아 건반을 누른 그 손이 그 파동을 퍼트리듯 허공을 유영할 때는 이 공간에 있는 모두에게 이 공연이 행복하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곳곳에서는 휘파람과 환호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후 이어진 두 곡의 앵콜이 끝나고 난 뒤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을 떠날 수 있었다.

 

일리야 슈무클러는 곡을 꾸릴 때 관객들에게 ‘여행’하는 느낌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곡을 선정한다고 한다.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주 동떨어진 공간에 다녀온 듯한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 한 대와 피아니스트 한 명이 선사한 단 한 번만 느낄 수 있는 여정이었다.

 

앞으로도 일리야 슈무클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여행을 선사해 주기 위해 바쁘게 연습하고, 또 연주하며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라는 영광을 쟁취한 일리야 슈무클러의 이후 행보와 그가 걸어가며 만들어낼 여정과 풍경을 기대해 본다.

 

 

 

컬쳐리스트_김민정.jpg

 

  

[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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