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의될 수 없어 불행하고 그렇기에 유일하게 아름다운 삶 – 연극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이중 슬릿을 통과한 전자는 어디로 갔는가
글 입력 2024.11.1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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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물리학은 나에게 순수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학문이었다. 내가 입시를 치르던 시절, 문과생은 과학 과목 점수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과목 중에 진실로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었던 과목은 물리학이 거의 유일했다. 그러니까 물리 책을 보는 중에 나는 앎에 기뻐하고 모름에 매달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물리 점수로 반에서 최고 등수에 들 수 있었고, 어느 날은 이과를 지망하던 학급생이 의문을 표해왔다. “나는 네가 당연히 이과 지망인 줄 알고 사실 좀 견제했는데 문과 간다며? 그런데 물리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해?” 그때 나도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사실 입시에서 이득을 보려면 물리 책 볼 시간을 다른 과목에 투자하는 게 나았다.


부모님의 의견 역시 그러하였고, 다음 학기에는 물리학 보는 시간을 줄였으며, 고학년부터는 교과 과정에서 과학 과목이 빠지며 자연스럽게 물리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면서 좋아하는 강의를 유일하게 들을 수 있다던 1학년 때 교양 물리를 신청했지만, 생각보다 난이도 높은 강의 수준에 결국 수강 포기를 하며 몇 년 간 나는 내가 물리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다시금 물리에 대한 나의 학구열을 자극한 것이 있었는데, 수많은 문화 예술에서 다루고 있는 ‘양자역학’이었다. 양자 역학에 대한 현대의 해석 이론 중 하나인 ‘다중 우주론’ 즉, ‘멀티버스’는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 누군가로부터 이 멀티버스 세계론을 다룬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추천받았고, 그날 이후 나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는 양자 역학에 대한 영상들을 틈날 때마다 탐독 중이다.


서론이 참 길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놓인 나에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이라는 이 연극의 제목은 반쯤 눈 뜬 채 있던 출근 길 졸음을 내쫓기에 정말 충분했다. 공연 소개 중 ‘인간의 실존이란 우주의 생성과정처럼,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분투의 과정’이라는 문구는 동의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공연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나는 이 공연을 보기로 ‘선택’했다.


 

 

메시지 : 빈껍데기로 남는 인생,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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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우리의 삶은 그리 분명하지 못하다. A와 B를 두고 고민을 하다 A를 선택한 나는 B를 선택했다면 살게 되었을 나의 삶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다.


그것이 다중 우주를 상상케 만드는 씨앗이 된다. 어쩌면 우주는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할 때마다 갈라지고 있고, 그렇게 무한하게 생성된 우주 속에는 나의 모습을 한 채 나와는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또다른 ‘나’가 있다고 말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차연’은 아이슈타인처럼 ‘단 한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한다. 태양의 중력으로 인해 생긴 굴곡,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주의 변수만 알아낸다면 우주의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러나 그녀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이 살아있는 동안 ‘말도 안되는 학문’이라며 혐오해 마지 않던 양자 역학처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형태로 얽히고 섥히기 시작한다.


이 명확함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우주 속,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노파로 이어진다. 노파는 스스로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실마리를 끊임없이 찾아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주변의 말은 ‘그런 두루뭉실한 표현 말고, 명확한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증명 받기 위해 분투한 그녀의 삶, 차연의 삶인지 노파의 삶인지 알 수 없는 그 삶의 끝에 남는 것은 정말로 빈 껍데기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 믿기 어렵다.


극 중 ‘주변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서 주변부를 빼놓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제자, 누군가의 애인이 아닌 ‘나’, 이 세계에 존재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주체 자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불가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서 희망을 가지고,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어쩌면 야광 버섯에 있다. 극 중 끊임 없이 언급되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등장한 서회장의 취미는 야광 버섯을 가꾸고 그 수를 세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아이처럼 웃고 또 때로는 아이처럼 운다.


야광 버섯 동호회의 앙꼬는 그런 서회장의 어딘가 어설프고 이상한 모습을 부러워한다. 자신은 그런 가슴 뛰는 일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서회장은 흘러가는 세월도 잊고 그 수많은 야광 버섯에 몰두한다. 그 안에서 어쩌면 그녀는 비로소 주변부가 아닌 주체적인 자신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구성: 곳곳에 숨겨진 양자역학의 이스터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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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보는 동안 양자 역학을 좋아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 저거!’하며 반가운 구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연극은 극중 대사에, 무대 구성에, 소품에 양자 역학을 마치 이스터 에그처럼 심어두고 찾아보는 재미를 준다.


무대의 배경 판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개의 문과 같은 문양과 가운데 둥근 원이다. 어쩐지 양자 역학의 시초가 되었던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을 연상케 한다. 1927년 과학자들은 이중 전자 슬릿에 전자를 통과시키는 실험을 하며 전자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형태를 띨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내었고, 여기서부터 골치 아픈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이 시작되었다.


두 이중 슬릿 가운데 위치한 둥근 원은 마치 입자처럼 자신의 형태를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이 내린 후 가까이 다가가본 원 모양 판넬 안에는 빛을 이용해 촘촘히 흩어져 있는 정의할 수 없는 전자들의 분포가 표현되어 있었다.


극 중 노파의 남편으로 불리는 남자는 자신이 꿈 속에서 상자 속에 있었는데 몸이 점차 사라졌고, 자신은 본인의 이름을 불러 정의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유명한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디테일한 구성과 설정들이 극이 주는 메시지의 가장 큰 토대가 되는 양자 역학을 끊임 없이 상기시키며 몰입을 도왔다. 이에 더해 다른 연극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특별한 구성들이 이 공연의 복잡미묘한 매력을 더해 주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야광버섯을 세는 서회장의 독백이 극 중 내내 이어지며 극의 흐름을 어김 없이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대사에 몰입하는 듯 하면서도 일정한 때가 되면 다들 고장난 로봇처럼 ‘140-1, 140-2…’와 같은 숫자를 중얼거린다. 후에 이는 서회장의 독백으로 드러났지만 관객들은 이 대사가 반복될 때마다 어리 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끊임없이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현실을 일깨우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떠올리게 했다.


더불어 인물들의 역할과 관계가 점차 복잡하게 얽히고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 또한 흥미로웠는데, 가령 경찰 노릇을 하는 노숙자가 있는가 하면, 단호박과 앙꼬는 때로 연인으로, 부부로, 이혼하여 남으로 존재하고, 급기야 극 중 어떤 장면에서 배우들은 각자 맡았던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말그대로 엉망진창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어쩌면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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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의 소개를 처음 접했을 땐 참 매정한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인생에서 분투할지라도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라니, 운명 결정론적인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공연은 예측 불가능한 우리의 삶, 그렇기에 그 속에서 하는 우리의 선택들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인생은 여전히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는 그 선택이 옳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선택한 한가지의 면만 볼 수 있는 유한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변부를 무시하고 온전히 나라는 주체에 몰입하며 살아가면 된다. 비록 그 끝이 빈 껍데기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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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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