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손에 쥘 수 있는 것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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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쥘 수 있는 것
친구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더 가는 이가 있듯, 물건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애정이 가는 것들이 있다. 유행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몸에 착 감기는 재킷, 실밥이 다 풀려도 버릴 수 없는 오래된 인형,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가 남은 물건, 가사와 추임새까지 다 외운 노래가 담긴 CD처럼 말이다.
이런 물건들은 마치 공기처럼 곁에 머무르다가, 지친 순간에 조용히 우리를 다독여준다.
우리는 왜 이렇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물건들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고, 쉽게 놓지 못하는 걸까?
식탁 위에 놓인 검은색 트로피같이 보이는 물건이 보일 것이다. 이것은 레드 제플린의 7집 앨범커버로 힙노시스 스튜디오(Hipgnosis Studio)에서 제작을 맡은 것이다. 스튜디오 공동 대표인 오브리 파월(Aubrey Powell)은 이 커버를 구상하면서, ‘검정 물체’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갖길 바랐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물체’를 하나 만드는 것에 대해 논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직종이나 계층을 불문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갈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힘을 상징할 수 있는 물체를 원했다. 사람을 위한 배터리라고 할까, 손을 가져다 대면 다시금 그 사람에게 힘을 채워 주는 그런 물체. 또한, 우리는 이 물체가 어디서든 소지하고 비치할 수 있는 물건이기를 원했다. 집 안이든, 직장이든, 휴양지이든 말이다. 산소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그런 이치의 물체를 만들고 싶었다. 삶의 모든 순간에 힘을 실어 주는 레드 제플린의 헤어날 수 없는 중독적인 음악, 그리고 이 마력을 상징할 수 있는 어느 검은 물체.
- 힙노시스 전시문 발췌
김초엽 작가는 이런 마음들을 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감정의 물성‘에서 주인공과 후배의 대화를 통해 풀어냈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 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 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바보 같았는지 유진은 씩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대한민국: 허블, 2019. 발췌
이렇듯 물건이 가진 물성, 그 존재감은 흔적을 남기고 감정을 담아낸다. 그리고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곁에 머물러 주는 물건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마치 “안심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는 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느꼈던 “행복한 순간들”을 붙잡아두고,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곁에 남겨 두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마치 어릴 적 애착 인형을 어디든 데려가고 싶어 했던 마음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런 애정이 생겼는지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그 물건 안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얻고 삶에 더 깊은 애정을 쏟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가 조금 지쳤다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곁을 지키고 있는 물건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그걸 기억하며 살아가자.
[박지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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