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하여 -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글 입력 2024.11.0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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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필자에게 꿈이 생겼다. 좋아하는 영국 배우를 따라 성공하여 영국을 방문하겠다는 꿈. 워킹홀리데이 역시 생각해 보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떠올라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기분으로 떠나는 것은 불가했다. 그래서 전문성을 쌓고, 쌓은 전문성으로 ‘성공’이라는 위치에서 영국에 가겠다는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배우도 ‘필요’로 할 정도의 위치. 그렇게 필자는 배우를, 배우는 필자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당사자도 모를 계획을 되새긴다. 이러한 ‘사랑’은 한 움큼 ‘세상’을 넓혀준다.
그래서 작가의 감정을 공감하며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루마니아의 소설가가 된 히키코모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팬들이 행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친구로서의 사랑, 연인으로서의 사랑, 가족으로서의 사랑. 단순한 말장난으로 보이나, 흔히 ‘사랑’이 붙는 경우는 가까운 사람이 당사자를 챙기는 모습에서 비롯된다. 우울도 그렇다. 같은 곳만 몇십 분을 바라보는 등 ‘우울’이라는 감정 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행위도 이루어진다.
페이스북에서 루마나인 3,000명에게 친구 요청을 보냈던 작가를 통해 실천력을,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의 <경찰, 형용사>를 보면서 루마니아어에 강한 흥미를 느낀 작가를 통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한 문장으로 종합하면,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의 <경찰, 형용사>를 보면서 루마니아어에 강한 흥미를 느꼈고, 루마니아어를 더 공부하고자 페이스북에서 루마나인 3,000명에게 친구 요청을 보낸 작가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번역가 또한 『그깟 ‘덕질’이 우리를 살게 할 거야』를 작성한 사실을 알게 되어 사람 다 똑같다며 낄낄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작가를, 또 다른 누군가는 번역을, 어느 누군가는 제삼자가 되어 감상을 작성하며 ‘그깟’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습들은 강한 색채를 띤다.그렇게 되어서 그런 것들
종종 글을 기고한다고 말할 때가 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필요에 따라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중 소재로 사용된 어느 날이었다. 관람한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던 중에 ‘신기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필자가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통 작품은 단순히 관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인식’하거나 ‘관람’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것을 창작했기에 상대방에게 ‘신기한’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자각하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해당 책을 감상하면서 그 사람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 작품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영화다. 영화 비평가로서는 루마니아 영화에 푹 빠져서 루마니아 비평가나 시나리오 작가와 관계를 맺은 계기가 되었고, 돌고 돌아 소설가로서 활동하기 위한 연결고리도 만들어주었으니까. - P.40
작가는 <경찰, 형용사>를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기껏 해도 편지를 작성할 때일 것이다. 매력적인 요소를 설명하며 ‘그래서’ 좋다기보다 ‘그냥’이라는 표현이 더 흔한 요즘, 짧은 감상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루마니아어를 주제로 삼아 작중에서 수없이 루마니아어가 언급되고 ‘그래서’ 루마니아어를 배우게 되었다는 계기는 관객으로서 <경찰, 형용사>가 가진 ‘가치’를 실현한 셈이다. 더 나아가 히키코모리였던 작가가 루마니아 비평가나 시나리오 작가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작가의 ‘세상’이 넓어진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무언가를 향한 ‘사랑’은 스스로를 채워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한다. 무언가를 향한 ‘사랑’을 억압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일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 그럼을 행사한다.예이, 삶의 무게를 견디며
예이, 인생, 낙이 있으면 고통도 있지, 예이. - P.199
철자 하나 틀리지 않은 채로 199쪽에 그대로 적힌 문장이다. 예이, 인생, 낙이 있으면 고통도 있지, 예이. 히키코모리 상태에서 루마니아어를 독학한 작가의 성격인지 혹은 번역가의 문체인지도 모를 이 문장은 매우 ‘긍정적’이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준다. 더군다나 소제목이 ‘크론병’이라면, 그 감정은 더욱 격화된다.
이 소제목에서 작가는 2021년 3월부터 최소한 몇 달은 절대 안정하며 부모님의 간병을 받는 생활이 이어졌다고 한다. 매일 열 정이 넘는 약을 먹고, 가끔은 특정 질환 보조를 받지 않으면 10만 엔이나 드는 약을 링거로 맞아야 했으나, 매일 꾸준히 복용하여 장 이외에는 정신까지 포함해 이례적으로 양호해질 수 있었다. 장 이외에는 양호해 긍정적이냐고 묻기에는 매일 열 정이 넘는 약을 먹었어야 했을 작가의 심정은 상상조차 어렵다. 사이트에 ‘열 정이 넘는 약’을 검색해도 ‘당뇨약’ 정도만 나올 뿐이다.
어떤 이들은 ‘맨땅에 헤딩’이라고 한다. 일단 들이대고 보는 정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로 맨땅에 헤딩하려 한다면, 두개골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헤딩보다 뭐든 ‘차근차근’ 나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기는 하니까. 그러니까 차근차근, 예이.[고은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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