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잃어버린 것과 살아가는 것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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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 등뒤에는 남이 볼 수 없는 문이 하나 있었다. 때때로 이 문이 열렸다.
나의 뒤에 사후세계와 연결된 문이 있다면 어떨까. 정확히는 사후세계가 아닐지 모르지만, 죽은 이들이 때때로 열고 나오는 문이 있다면.
황정은의 <문>은 바로 그 문의 이야기다.
m의 문이 처음 열린 것은(그의 기억에 의하면) 할머니에 의해서였다. m이 열다섯 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난 후, 어느 날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았다.
문이 또 다시 열린 것은 카키색 셔츠를 입은 남자에 의해서였다.
그는 m이 일터로 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m에게 말을 걸었고, 얼마 후 레일 위로 몸을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그는 m의 곁에 머물러 있다가 그가 죽던 날 있었던 일을 m에게 들려준다.
단편 소설이고, 큰 사건 없는 듯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만은 않은 작품이다.
작품에서 m은 특색이랄 게 없는 인물이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문이 존재하기는 한다만, 그것은 m의 재능이 아니다. 흔히 드라마에서 살리고자 하는 캐릭터성이 이 작품 <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딱 살만큼만 먹고 입으며 외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에게서 매력이라는 것을 찾기 어려우며 건조하다 못해 의식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물이다.
나는 잘 모르겠어.
m은 머리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아주 전부터 그랬어. 희로애락이 희박해.
희박하다고?
희박해. 그밖의 다른 감정도. 그건 그러니까.
m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엔터가 없다는 느낌이야. 전동식 타자기나 키보드를 보면 ㄱ자나 ㄴ자로 구부러진 자판이 있잖아. 그 부분의 블록이 없다는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건 꼭 그렇게 생겼어. 그 한 조각이 없어.
m이 언제부터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이야기 내내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m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은 결말 한 순간에다.
두리안.
응.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건 나쁜 걸까.
그렇지 않아. 두리안이 말했다. 그대로도 좋아.
그건 그대로도 좋아. 왜냐하면......
두리안의 목소리가 이제 너무 흐릿해서,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그 대화 후 두리안은 사라지고, m은 삼촌에게(일터인 제본소에 계신) 연락을 하러 가며 이야기는 끝난다.
결정적이라는 것은 사전적으로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 '일의 결과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것'을 뜻한다. 두리안은 사라지며 m에게 엔터 조각을 남겼다. m이 자신에게 부족하다 했던 것.
할머니는 커피를 필요로 했고, 두리안은 말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m은 희노애락의 희박함을 느꼈다. 한 번도 결정적으로 자리잡아 보지 못한 m에게 두리안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 나는 그것이 자각이리라 생각해 본다.
잠시 m과 두리안의 대화로 돌아가서, m이 두리안에게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나쁠까에 대해 묻는 것은 자신의 상태에 안주하지만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안해하고 있는지 드러난 것은 아니다만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m은 그것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놓았다.
m은 두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희노애락을 받았다. 희박하다 여겼던 것이 채워졌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없을지라도. 두리안과의 만남이 치유나 연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라지만 m도, 우리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그대로도 좋다.
우리는 살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채로 살아간다. 아무리 채워도 빈 공간이 생기고, 그 상실의 공간은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채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테트리스를 하듯 가득 채워 놓고 완벽하게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m에게는 이제 할머니도, 두리안도 없지만 다시 자신의 삶을 향해 갈 수 있다.
[박수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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