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상처, 그 보편적인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릴 적 내게 어른에 대한 관념은 단순했지만, 그만큼 명료했다. 맛있는 반찬을 양보해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어른이었다. 어릴 적 개수가 홀수인 반찬을 나눠 먹을 때면 꼭 내 몫보다 한 개가 더 먹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내게 당신 몫을 먹으라고 밥 위에 반찬을 한 점 올려주었다. 이미 배가 찼거나 먹고 싶지 않은 반찬이 있는 게 아닌 한 반찬을 양보해 주는 일이 없던 내게 그것은 쉽지 않은 결단으로 보였다. 아이인 나는 쉽게 할 수 없고 어른인 부모님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자연스레 어른이란 인내와 양보를 실천하는 별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관계든 간에 많은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가장 가까운 어른이고 그들을 통해 어른이 무엇인지 배운다. 우리는 아이가 일방적으로 어른의 손에 길러지고 조형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분명 아이는 어른과의 관계와 세상살이 속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스스로 처리하는 법을 터득하며 어른으로 자라난다. 달리 말하면 아이는 좋은 추억 뿐만 아니라 가슴이 따끔할 만큼 아픈 기억으로도 성장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는 입으로만 웃는 지친 표정을 짓는 이유, 무례한 사람에게 미소 짓는 심리 같은 행동의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자신이 봐온 이들과 닮은 어른이 되어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다만, 이는 모든 아이가 똑같이 밟는 통일된 수순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보다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몸이 크고도 어른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당장 자녀 고민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사연 댓글이 숱하게 달려 있다. 유년기에 비슷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서로 보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새 깊이 감동하기도 한다.
이런 광경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콘텐츠를 굳이 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자신 내면의 슬픔을 거울을 보듯 마주하고 받지 못했던 위로를 자신에게도 전하게 되는 치유의 기능 또한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고통과 정화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낄 때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이 완성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강의 단편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에 실린 단편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는 순수한 호기심마저 잃어버린 채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의 세계로 내몰리는 '태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은 활기차게 뛰어논 후 기분 좋은 탈력감으로 지쳐가는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가정이 무너지는 감정적으로 소모적인 상황 속 지쳐가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다. 이야기의 막바지로 갈수록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지만, 아이는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우울한 내면이 아이에게 전이되면서 아이의 세계였던 연약한 껍데기가 벗겨진다. 아이는 이 때문에 이르게 어른이 되어버리고 아이의 세계에 머무르던 호기심은 그 순간부로 사그라든다.
상상의 힘을 잃고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의 이야기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녘에 아이는, 여관방 창 너머로 아스라이 사위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싶어진다. 흙펄을 핥는 파도의 거품이 흰빛인지 황금빛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_p.43
아이가 개들을 만난 것은 오후 두 시경의 일이었다. 하지만 해질녘이 되면 그 개들도 흰 흙펄에 비친 석양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아이를 에워싸고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대는 대신 잠자코 아이와 함께 걸어가지 않을까? 일렬로 바다 쪽을 향해 앉아 꼼짝 않고 일몰을 지켜보지 않을까? 이맘때가 되면 언제나 그것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_p.47
아이가 처음에 품었던 호기심이란 이토록 순수하다. 태련은 해질녘 노을이 퍼지는 아름다운 바다와 파도의 색을 보고 싶어 한다. 자신만 보면 짖어대는 개가 해질녘에는 절경을 보고 싶어 짖는 것을 멈추지 않을까 궁금해한다. 태련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아이는 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해질녘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개와 함께 해질녘을 볼 수도 있다. 개와 화해하는 어떤 순간이 기적처럼 도래하고 아이는 개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슬프게도 이러한 태련의 호기심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아버지가 가출한 어머니를 찾으러 태련을 데리고 다닐 때 태련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반추하곤 하는데 사실, 이때부터 태련의 아이답지 않은 면모가 확인된다. 웃는 입을 하고 있는 붕어빵은 반죽을 찍는 틀의 모양 때문에 웃고 있다는 것을 태련은 알고 있다. 물론 어머니 옆에서 붕어빵을 굽는 모습을 질리도록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 아이가 가질 수도 있는 호기심 중 하나를 소거해 버렸다는 대목에서 입이 쓴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아빠가 몹시 울었지. 바늘로 찌르면 바늘 자국만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 그래서 아빠가 좋아졌단다.
언제였던가, 아이가 엄마에게 왜 아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대답했었다. 그때 아이는 자신이 전날 오후 문지방에서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났을 때 악을 쓰고 울어댔던 것을 기억했고, 엄마가 아이의 무릎을 빨아줬던 것을 뒤이어 떠올렸으며, 우는 것과 좋아지는 건 뭔가 분명한 관계가 있는 거라고 결론 내렸었다. _p.61
목청껏 짖어대던 개의 눈시울이 움찔움찔 경련한다. 아이는 그것이 이상해 더욱 유심히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개는 어떤 기분일까?
짖는 소리가 자지러진다. 개의 어깨가 소스라치더니 떨기 시작한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무릎이 오그라들며 꼬리가 숨는다. 개의 연한 갈색 눈에 어린 공포를, 잦아드는 울음소리를 아이는 똑똑히 보고 듣는다.
나 때문에?
제 시선의 위력에 아이는 놀란다. 아이는 개가 무서웠다. 그런데 저 개도 날 무서워하나? _p.66, 67
태련은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감정의 정체를 점점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때 개의 모습은 아버지와 등치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태련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을 개가 느끼는 공포와 같은 것으로 본다. 어머니를 만나 사랑을 알고 이전과 달리 나약해진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는 꼭 태련만 보면 짖어대던 개의 모습과 닮았다.
태련은 아버지를 향한 동정심을 품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같이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태련은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버지를 향한 ‘지겨움’을 줄곧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태련은 떠나지 않고, 떠나지 못한다. 가출의 현실성을 떠나 논하자면, 태련이 느끼는 '지겨움'은 태련 안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가 소명되지 않았다. 태련은 어머니의 말을 빌려 쓰고 어머니의 말을 곱씹으면서도 그저 그 감정을 느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태련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 침잠해 계속해서 좋았던 추억과 상처를 받았던 기억 사이를 헤치고 나아간다. 소설에서는 태련의 기억과 현재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나면 태련은 그때마다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아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는 주변인의 대사를 통해서도 태련의 성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태련이 부모의 사이에서 불가역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도 종국에는 부모를 이해하게 될 서글픈 미래를 암시한다.
바닷바람이 아이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펴려 애쓰며 아이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허가 주택들의 들쭉날쭉한 담벼락들이 흐린 시야 속에서 겹쳐진다. 해질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 _p.99
어른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되면 아이는 쉽게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론 아이가 어른의 감정을 머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된 순간 피부로 느껴지는 구체적인 삶의 애환은 쉽게 감정을 소모하고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야기의 끝에서, 태련은 더 이상 해질녘 개의 기분이 궁금하지 않다. 당연히 개와 함께 노을을 보는 상상도 사라진다. 태련의 모습은 낯설기도 하지만, 아주 익숙한 모습 같기도 하다. 태련의 안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찬가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는 읽는 내내 독자를 다소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만 추출되는 순도 높은 공감을 끌어낸다. 이러한 공감을 통해 우리는 태련의 삶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인류애의 의미를 환기하게 된다. 부조리에 대한 불만이 악인에 대한 처절한 응징으로 승화되고 있는 현재의 미디어에 익숙해질 무렵 접한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는 영구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도 미래로 나아가는 뭇 소시민의 삶의 가치를 비추고 있었다.
재차 말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종지부를 찍으면 진한 여운 속 고양된 감정을 갈무리하다 보면 후에는 역설적이게도 아이의 이후 삶을 향한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망은 사실 태련의 앞으로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독자의 개인적인 바람에 가깝다. 이렇게 동정심을 넘어 최종적으로 주인공을 향한 진심 어린 위로를 전달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잠재된 선한 면을 재발견하게 된다.
오랜 시간, 이상적인 어른을 상상할 때면 벽돌 같은 경험을 수직적으로 쌓아 올린 성의 이미지가 떠오르고는 했다. 이제는 그러한 견고한 모습이 침식과 재구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어른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련을 통과하고 나서도 삶을 유지할 줄 아는 회복 탄력성이다.
밀물처럼 밀려온 슬픔에 삶이 폐허가 되었을 때, 그 폐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냥 초라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련이 삶의 한 꺼풀을 벗겨내면서 드러나는 단단한 내면을 보고 감탄한 적도 적지 않다.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낡아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가 살아가는 인간에 찬가를 보내는 작품이라 느껴지는 이유는, 고통스러운 삶이더라도 삶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무한한 인류애의 의미를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