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공연은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이 10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는 점이 화제가 됐지만, 이탈리아 베로나에서만 볼 수 있던 <투란도트>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대중의 기대를 모았다. 컨테이너 55대 분량의 무대 세트와 공연 장비가 동원된 공연은 압도적이었고, 무대에서 한 시라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공연 이름 뒤에 붙은 '오리지널'이 납득이 가는 공연이었다.
하지만,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맺어지기까지의 과정과 결말이 아쉬웠다. 특히 3막에서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키스로 사랑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방인 남성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냈다며, 그 이름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이러한 서사에 동의하지 않는 연출가들이 <투란도트>를 각색해 공연으로 올리기도 했다. 독일의 감독 도리스 되리가 연출한 <투란도트>는 무대에 거대한 테디베어를 놓아 투란도트 공주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드러냈고, 국내에서는 연출가 손진책이 투란도트의 결말을 살짝 비틀어 류의 희생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투란도트>가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이 시대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현대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투란도트>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니, <투란도트>의 사람들이 사랑에 울고 웃는 과정을 살펴본 소감을 적고자 한다.

<투란도트>에서 수수께끼는 칼라프가 투란도트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정답은 순서대로 '희망', '피', '투란도트'로, 그 묘사와 정답은 칼라프가 투란도트 공주의 마음을 얻는 과정과 닮았다.
희망에서 시작하고, 애끓는 마음으로 불태우다 상대방의 이름을 온전히 호명하는 사랑, 머나먼 타자가 친밀한 사람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 수수께끼 이후에 이어지는 칼라프의 제안도 인상적이다. 칼라프가 단순히 투란도트에게 반한 무자비한 정복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칼라프는 수수께끼를 맞췄으므로, 투란도트와 혼인했어야 한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투란도트는 청혼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칼라프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동이 트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아낸다면 자신을 죽여도 좋다는 제안이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투란도트를 붙잡지 않는 모습은 투란도트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소 얼빠진 것 같지만, 진중한 마음과 여유가 없다면 할 수 없는 과감한 제안이다. 그래서 칼라프의 사랑은 도전과 인내라고 말할 수 있다. 투란도트에게 반해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다는 칼라프를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기어이 도전하고야 만다. 투란도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까지 투란도트를 기다렸다. 칼라프는 북경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투란도트를 아내로 맞이하는 기회를 얻었지만, 가장 충직한 노예 류를 잃어버렸다.
류의 사랑은 숭고한 희생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류는 투란도트의 고문에도 끝까지 칼라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자결하고 만다. 그런 류에게 투란도트는 무엇이 너를 그렇게 강하게 하느냐 묻고, 류는 사랑이라 답한다. 결국 투란도트는 류의 희생에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사랑을 시작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류의 희생은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투란도트의 내면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인물이었다. 푸치니가 원작에 없던 류를 창조하고, 희생시키면서까지 말하고 싶은 점은 '사랑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현대에 와서도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는 '사랑'을 아주 직관적이고 순진하며, 잔인한 방식으로 제시한 셈이다. 사랑의 언어를 모르는 투란도트에게 류의 자결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잠시 생각해 보자.

공연을 보면서 한 명의 상처받은 인물이 사랑을 마주하기까지 과정이 참 지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함도,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는 기백과 지고지순한 희생은 일관적인 마음이다. 표면적으로 사랑에 승리한 인물은 칼라프 왕자이지만, 패배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칼라프가 투란도트의 마음을 얻기까지의 결말이 더욱 아쉽다고 느꼈다.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입 맞추는 장면은 칼라프, 류, 투란도트가 겪은 지난한 사랑을 묻어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한, <투란도트>가 '사랑의 승리'를 노래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고 짙은 농도로. 칼라프와 류, 투란도트가 예고 없이 갑자기 시작된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겪는 기쁨과 슬픔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랑은 불가항력이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시대 정서는 다르기에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날 공연을 본 모두는 1926년의 밀라노와 2024년의 서울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묶였음을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나는 당신들이 앞으로 마주할 여러 <투란도트>를 통해 사랑의 여러 단면을 엿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