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非) 인간 동물과 함께 살아가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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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서울동물영화제가 지난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메가박스 홍대, 그리고 23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상영관에서 개최되었다. '있는 힘껏 살다'(Life of Every Wholehearted Beat)가 슬로건인 이번 서울동물영화제에서 24개국 55편의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온라인 상영관과 오프라인 상영관에서 비인간 동물을 다양한 시선으로 다루는 작품들을 관람했다. 어떤 작품은 직접적으로 동물권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고, 어떤 작품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했다. 어떤 작품은 관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특정 동물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특정 동물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방법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보며 어떻게 다른 종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보여준 작품 5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양이 사냥>
사라진 대상과 점차 합일되는 도시 괴담의 얼굴을 한 인드라망 고양이 다큐멘터리.
고양이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동네는 좋은 동네다, 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해코지 하지 않는 동네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들이 사람을 많이 경계하지 않는 동네고, 동네 사람들이 그만큼 공격적이지 않고 작은 동물을 대할 때 배려한다는 뜻을 품는다.
<고양이 사냥>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생활하는 시기, 일본의 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없는 마을은 이상하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보이는 동네의 모습에는 고양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스코트 캐릭터나 지나가는 화물 차량의 마스코트 캐릭터, 엉성한 그라피티로만 언뜻 보일 뿐이다. 카메라는 구석구석 고양이가 있을 법한 좁은 골목이나 건물 틈, 주차된 차량 밑을 탐색하지만, 고양이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도 돌아오는 답변은 없다.
동네를 지나다니는 개들, 개의 형상을 한 조형물들을 발견한 카메라는 어쩐지 그들이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마!'라고 말하는 듯한 음산한 메시지를 읽어낸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더욱 뛰어나다며 고양이가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고양이에게도 전파될 수 있으니까, 고양이가 사람들을 피하는 게 아닐까, 혹은 고양이들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동네에서 자취를 감춘 것일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가설들이 펼쳐진다.
카메라는 고양이들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어느새 사유지에 무단출입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고양이를 찾는다는 건 곧 고양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고양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된다. 고양이가 없는 기이한 상황의 원인을 추리하는 건 곧 사라져 버린 대상과 자신의 마음을 겹쳐본다는 걸 의미한다.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고양이가 흔적을 감춘 동네에서 마침내 자신이 고양이가 된 카메라가 말한다.
<유체 님프>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라는 상상력에서 벗어나 가까이 있는 존재를 신으로 바라보기
어떤 생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진득하게 오래도록 응시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거나 새로운 것이 보인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그 위에 새로운 시선이 파고든다.
네덜란드 로테 강의 신화를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편형 동물의 신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불멸의 신화적 존재들을 말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편형 동물의 신체는 강물이 되었다가 불꽃이 되었다가 자연 그 자체가 된다. 노화하지 않고 불멸인 편형 동물은 신화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사이사이에 삽입된 실험실의 풍경과 과학자의 설명은 실험체로서의 편형 동물을 상기시킨다. 노화 연구를 위해 편형 동물의 신체는 실험실 안에서 통제되고, 이들의 회복 탄력성을 실험하는 일은 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입하는 일이다. 방사선을 비롯한 각종 외부 자극에도 훼손되지 않는 이들의 생명력과 매끈하고 휘어지는 신체는 생명의 근원인 물과 연결된다. 실험실 안에서 절대 파괴되지 않는 신체는 편형 동물이 신화적 존재, 즉 님프임을 상기시킨다.
<러브 데스 도그>
개와 사람의 관계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역사를 비춘다.
연구와 분류를 위해 사진이 찍히는 것, 전시되는 것, '나와 다른 것'으로 취급되는 것. 일본의 내선일체 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으며 한국의 개와 일본의 개는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연구가 진행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연구 과정은 대상을 정말 본인과 '같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사진으로 기록된 조선의 사람과 개의 모습은 연구하는 자와 연구 당하는 자, 그리고 구경하는 자와 구경 당하는 자로 철저하게 나뉘었을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의 개와 사람은 동등하게 낮게 위치되었다는 자막과 함께 한국인과 한국의 개가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었는지 드러난다.
서구 사회의 '애완견' 개념을 접한 일본 사회는 개들과 자신의 관계를 야만적이라고 느끼고 이를 자신들의 식민지인 조선에도 대입한다. 그리고 조선 땅에서도 대대적인 광견병 단속 작업이 시작된다. 당시 광견병에 걸린 개를 완벽히 구분할 방식이 없음에도 사나운 개들은 광견병에 걸렸다고 간주하였다. 이전까지는 개를 '소유'한다는 개념이 희미했지만, 몸에 '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찰이 없거나 사나운 개는 때려죽여도 된다는 법에 따라 사람들은 개를 '소유'하고 '주인'이 된다. 통제하고 소유해야 하는 대상이 된 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거쳐 다시 한번 '나와 다른 것', '위험하고 야만적인 것'이 된다.
박물관으로 개조당한 창경궁을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거닐고 있다. 그 장면 위로 통제당하는 대상이자 개를 통제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상황과 가장 취약한 자리에서 폭력에 노출된 개의 상황이 자막으로 드러난다.
이후 카메라는 현대의 공원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개'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담는다.
다큐멘터리는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사람과 개, 그리고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톺아보고,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들숨과 날숨에 따라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노견의 모습을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한다. 앙상한 갈비뼈와 검버섯이 개의 나이 듦을 짐작하게 한다. 많은 보살핌을 거쳐왔을 개의 육체를 통해 현대의 한국에서 개와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며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개의 모습을 전한다.
<개의 심장>
사랑, 그리움, 죽음, 사후 세계가 얽혀 유기적으로 흐르는 비디오 에세이
로라 앤더슨의 비디오 에세이 <개의 심장>은 현실 세계와 꿈속 세계, 반려견 롤라벨을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회고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서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든다. 문학과 철학에서 가져온 인용구들이 이음매처럼 군데군데 빛난다.
영화 속에 인용된 "모든 사랑 이야기는 유령 이야기다."라는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의 문장처럼, 이 영화 또한 사랑 이야기이자 유령 이야기다. 세상을 떠난 반려견 롤라벨, 친구 고든, 어머니, 그리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반려자 루 리드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의 이야기다.
모든 존재는 죽음에 다가갔다가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막아서는 안된다. 라는 조언을 들은 감독은 롤라벨을 집으로 데려오고 3일간 함께 시간을 보낸다. 죽음으로부터 유예되는 시간, 롤라벨과 함께한 과거를 떠올리고 롤라벨이 물리적으로 곁에 없는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이 그 과정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오르며 루 리드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 여자와 이에 답하는 남자의 대화가 가사다. '사랑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영화 속의 시간도 몇 번이고 되돌려진다. 롤라벨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 산책을 하는 모습, 그리고 롤라벨이 죽음 이후에 겪는 49일을 로라 앤더슨이 상상한 것. 감독은 "삶을 알려면 과거를 보아야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향해가야 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하지만, 영화를 통해 과거와 미래가 정확히 나뉘지 않는 현상을 공유한다. 과거와 미래는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과거는 끊임없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해부학수업 챕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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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사물이 되어버린, 도구가 되어버린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 관한 기록과 질문
세 인물이 10대 시절 각자 경험했던 과학 시간의 개구리 해부 과정, 그때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한다. 화면에는 화자들의 얼굴이 아니라 정확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드러난다.
생명을 가진 개구리를 자연이 아닌 실험실에서 처음 만났던 경험은 실험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 한다. 소위 '이성적'으로 대할지 또는 개구리를 향해 안타까운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랐던 시간이다. 반 친구 중 누군가는 기절하고, 누군가는 실험의 목적을 상기하고, 누군가는 실험 과정을 잘못 이해해서 개구리의 머리를 완전히 잘라내고는 죄책감을 느낀다. 실험실의 개구리를 대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은 모순과 분열을 품고 있다.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만난 경험은 이후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대할 때 종종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기 위해 그들이 감정과 생각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돌아보는 것으로 연결된다. 실험실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자기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개구리의 신체는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도구와 같다. 개구리는 사물이 되어버린다.
인류의 발전, 지식의 획득, 앎의 추구. 과연 개구리 해부는 이런 커다란 개념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은 희미하고 알아보기 어려운 이미지들의 연속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지식의 획득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행했던 인체 실험 당시의 이미지다. 일본 제국군이 중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 동안 마루타(나무 통나무)라고 부르며 실험실에서 사물로 만들어버린, 도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기록된 이미지다. 영화는 이미지의 정체를 밝히며 질문을 확장하고 끝이 난다.
[안소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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