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8일. 말쑥한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안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연장을 보자 나는 실감이 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그리고 다신 국내에선 보지 못할 엄청난 규모의 <투란도트> 공연장에 내가 도착한 것이다.
탈. 그렇다. 이 공연의 첫 시작에 여러 잡음이 들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겠다. 올림픽체조경기장은 예술의 전당이 아니다.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가 아닌 만큼, 음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이곳에서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또 감안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문제가 되었던 건 내부 음향이 아니라, 주변의 잡음이었다.
막이 오른 첫 주말, 사람들은 인근에서 열린 콘서트와 페스티벌의 소음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아레나 디 베로나'는 이탈리아의 고대 원형 경기장에서 매년 펼쳐지는 오페라 페스티벌의 이름이다. 그 정신을 받들어 일반적인 장소가 아닌 경기장에 무대를 올린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나, 다른 어떤 무대보다도 사람의 목소리에 의존하는 공연인 오페라에겐 그것이 치명적인 탈이었다. 게다가 여긴 매년 공연이 열리는 이탈리아가 아니니, 기대를 한가득 가지고 왔을 팬들은 적잖은 실망을 느꼈으리라.
해당 문제를 겪었던 회차의 관객들에겐 후속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나는 무대를 직접 보기 전까진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작년, 아주 좋은 기회로 푸치니의 <토스카>를 관람한 나는 오페라가 학생 시절 음악 시간에 들었던 지루한 공연 그 이상의 것임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 <투란도트>가 대체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공주는 왜 잠을 못 이루고, 투란도트는 어떤 수수께끼를 내는가. 극은 몰라도 이름만큼은 안다는 그 작품. <투란도트> 유명세의 이유를 온전한 공연으로 체감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관객이 착석하고 소음이 잦아드는 무렵. 공연은 7시 30분을 조금 넘어서 시작했다.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던 나의 걱정은 5분이 지나 말끔히 사라졌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마을의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와 공연에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투란도트>는 내가 본 중 가장 화려하고 장대한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보면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사람, 그리고 또 하나는 무대다.
족히 100명은 넘을듯한 인원이 무대 여기저기를 잘 짜인 동작으로 돌아다니고, 음악을 부르는 것은 정말이지 멋진 광경이다. 무대 바로 아래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단까지 헤아린다면 과장 보태어 공연자의 수가 관객의 수만큼이나 됐다. 그러므로 선율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사치스럽도록 화려한지는 오직 그 자리에 있던 관객만이 알 것이다.
또 하나는 무대, 그러니까 세트장이다. 3막으로 구성된 극인 만큼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선 연출이 중요하다. 세트가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세트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실제 황실을 떼어다 옮겨놓은 듯, 거대하고 빛나는 투란도트만의 중국 황실을 보고 있으면 고가의 티켓값이 납득이 간다. 단지 넓은 체조경기장의 텅 빈 공간을 가리기 위함인 줄 알았던 막이 걷히고, 저잣거리 뒤로 금빛 찬란한 궁의 모습이 드러날 때 나를 비롯한 관객이 탄성을 터뜨렸다. 도저히 이 공연에서 실망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던 순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투란도트>의 스토리는 그렇게 참신하지 않다. 오히려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부분도 있다. 20세기 초에 탄생한 극이니, 아시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탈리아의 예술가가 얼마나 중국을 이해하고 작품을 썼겠는가. <북극의 나누크>가 거의 동시대의 영상 예술이다. 작품을 보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와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당장 같은 줄의 관객 한 명이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글쎄, 중국의 공주 이름이 투란도트고 캐릭터 이름이 핑, 팡, 퐁 이라니. 게다가 천지신명과 기독교를 오가는 종교 혹은 인간관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낯선 중국을 보여준다. 판타지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서양 세계를 닮은 기묘한 소품들을 무대에 배치해 이 극이 현대와, 또 사실과는 무관함을 역으로 드러냈다.
게다가 가끔 등장하는 대사가 현시대의 인권 감수성과는 차이가 있어, 어느 정도 실망스럽기도 했다. 대사를 바꾸는 방식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으나, 우리가 관람하는 <투란도트>는 실험 오페라가 아니었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재밌게 보았던 작품을 성인이 되어 다시 보았다가, 실망하고 그대로 덮어두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되었던 것 같다. 그토록 고대하던 작품은 내가 그리던 완벽한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추앙받고, 또 계속해서 공연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 압도적인 화려한 미감이며, 유명한 노래들을 보고 또 듣고 있으면 내용과 무관하게 감동하게 된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은 단지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감상하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작품의 의의가 보인다. 그때의 생각들, 그때의 인물들, 또 지금과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그 당시만의 역동적인 문화예술. 그것들을 재현하고 또 지켜보는 것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겨우 작품 하나 보고 와서 그리 말하냐 콕 집어낼 수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지켜본 건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결국은 사랑 이야기다. 정열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그렇듯. 그리고 나는 이 사랑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았다.
투란도트는 사랑을 모르는 냉혈한 여인으로, 아름다워 수많은 남자의 청혼을 받지만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실패하면 죽이는 잔혹함을 보여준다. 과거 전쟁으로 인해 수모를 겪어야 했던 공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모든 남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주인공 칼라프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수많은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혼해 수수께끼를 모두 맞추고야 마는 불굴의 남자다. 회유의 술책으로 투란도트가 결혼하지 않을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는 수수께끼를 내고, 또 그녀가 실패하자 당신은 나의 것이라며 기뻐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두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탐색하고, 확인하고, 음미하는 기승전결의 사랑이 아니다. 승과 패가 있는,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있는 전쟁이다. 투란도트는 남자의 사랑에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렸는가? 글쎄, 그녀는 단지 칼라프를 흠모한 류라는 하인의 지극정성에 마음이 동하였을 뿐, 칼라프를 연인으로서 사랑하게 되었다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실패를 인정하고, 또 깔끔히 굴복했다.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당시 여성 인권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단지 때깔 좋은 작품일 뿐 억지로 상대를 취하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의 생각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아름다움은 사랑의 달콤함이 아닌 사랑이 주는 고통이다. 그 유명한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공주가 사랑 때문에 설레는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가 너무나도 싫어 밤새 방법을 궁리하는 동안 자신에 찬 남자와 겁에 질린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다. 그러니 이 작품의 주제를 정말 사랑의 힘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투란도트>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모두가 첫눈에 반해 곧바로 마음을 확인할 확률은 너무나도 희박하고, 판타지 중 판타지라 미디어에서도 그런 관계를 그리지 않는다. 말이 되냐며 비웃음을 살 확률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상대를 정복하거나, 회유하거나다.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낡고, 투박한 전쟁의 방식은 그 어떤 다른 감정도 아닌 사랑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도 압도적이다.
칼라프가 소중한 하인을 잃고도 사랑을 쟁취해서 웃을 수 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결혼을 피하던 투란도트가 머뭇대며 칼라프의 승리라고 손을 들어준 것은 결국 사랑이 힘의 논리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복, 혹은 피정복. 사랑을 하는 이들은 그렇게 두 유형뿐이라고 말이다. 아주 간단히.
약간의 지루한 구간이 있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정말 흥미롭게 본 공연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이름을 말할지, 아니면 모른 체 해줄지를 확인할 땐 나까지 괜히 긴장됐다.
오페라 문외한에 가까워 캐스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는데, 돔을 뚫을듯한 목소리들이 결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음악 시간에 들었던 그 지루한 네순 도르마는 공연장에서 들었을 때 감격과 무게가 달랐다. 그토록 웅장하고 아름답게 쓰인 음악이라니, 작곡가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