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대한 종이 인간의 세계 속으로 - 장줄리앙의 종이 세상

페이퍼 팩토리부터 시티까지
글 입력 2024.10.2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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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회화부터 조각, 미디어 아트까지 폭 넓은 장르의 톡톡 튀는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장줄리앙의 새로운 전시가 지난 9월부터 내년 3월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특히나 300평 규모의 신생 복합문화공간인 퍼블릭 가산에서 진행되며 전시 특성에 꼭 맞는 구성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장줄리앙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년 전 DDP에서 개최된 회고전 ‘그러면, 거기’를 통해서였다. 당시에도 그의 작품들은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센스, 평범한 일상을 뒤집는 작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웃음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장줄리앙만이 할 수 있는 작품과 구성으로 여전히 건재한 그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장줄리앙의 종이 세상’은 지난 2월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페이퍼 피플(종이 인간)’ 시리즈의 끝맺음을 짓는 역할을 함으로써 나아가 장줄리앙이 그려온 예술 세계의 한 부분을 일단락하고 또다른 챕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그 특별함만큼이나 이번 전시는 유독 광할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크게 3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높은 층고와 넉넉한 공간을 장줄리앙이 그간 보여준 수많은 형식의 작품들이 채운다. 작품의 가짓수 자체는 많다고 볼 수 없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형 작품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은 구성이 새로운 출발을 앞둔 대형 복합 문화공간을 만나 빛을 발했다.


 

 

1st section 페이퍼 팩토리(Paper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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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전시장을 들어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공간은 페이퍼 팩토리다. 이름 그대로 이 곳에서 종이 인간들이 태어나고 가공되어 세상에 처음 나오게 된다. 층고가 높은 탁 트인 공간 곳곳에서 아직 그려지고 있는 중이거나, 먼저 태어난 종이 인간에 의해 종이로부터 잘려 나오고 있거나, 혹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채색되고 있는 등 다양한 상태의 종이 인간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장 줄리앙의 설명에 의하면, 종이 인간들은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의 진화 과정을 연구하여 수년 간의 시도 끝에 복제의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 팩토리에서 손쉽게 새로운 종이 인간들이 태어날 뿐 아니라 필요에 맞게 생김새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가의 이런 무한한 상상력이었다. 인간을 닮은 듯하면서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와 설정을 구축하고 있는 이 종이 인간들은 마치 지구와 비슷한 다른 행성계에 사는 외계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선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구석으로 보는 이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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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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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장줄리앙이 만들어낸 이 종이 인간 세계가 유독 매력적인 데에는 그의 상상력을 뒷받침해주는 섬세한 디테일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이퍼 팩토리 벽면 곳곳에 그들이 참고했을 만한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들의 모습, 몇 가지 동물들을 섞어 놓은 듯한 그림을 통해 연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고, 컨베이어 벨트 위로 채색 전, 채색 중, 마무리 가공 중인 종이 인간들을 단계 별로 만나볼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작가가 심어놓은 디테일한 설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


게다가 장줄리앙은 전시장의 높은 층고를 빈틈없이 활용하여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한 구성을 만들어냈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들의 그림, 천장 위에 마치 의류처럼 걸려 건조되고 있는 종이 인간들, 그들을 한 눈에 내려다볼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가진 거대 종이 인간까지, 면적만 놓고 보았을 때 그리 크지 않은 이 섹션의 수직 공간을 재미있게 활용한 덕분에 첫번째 섹션에서부터 관람객의 흥미를 제대로 돋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2nd section 페이퍼 정글(Paper Jun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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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두 번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기다란 몸체를 가진 뱀이다.

 

공간 안쪽까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몸에는 타임 라인에 따라 종이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림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을 맞이하는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시선이 가는 얼굴의 뱀의 눈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걷다 보면 앞서 여러 양상을 살펴보며 친근감을 쌓은 종이 인간들에 대해 더욱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다.


뱀이 보여주는 앞 부분의 그림은 우리 인간의 역사를 연상케 한다. 빅뱅으로 일컫는 우주적 충돌과 그로부터 탄생한 해양 생물, 공룡의 모습을 지나 공간의 안쪽으로 걸음 하면, 덩치 큰 동물들 사이로 조그마한 인간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곧 문명을 구축하며 거대한 건축물들을 만들어 내고, 총과 칼을 가져와 서로를 약탈하기를 지나 검은 매연을 내뿜는 산업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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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검은 연기로 뒤덮인 인간 세계의 끝부분에는 무수한 로켓들이 우주의 행성들 사이로 날아가는 모습을 통해 처음과 같은 형식으로 마무리되며 다소 씁쓸한 인류의 말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으로부터 종이 인간의 탄생이 시작된다. 나무에서 베어져 한 인간의 손에 들어온 종이 위로 역사상 첫 종이 인간이 그려져 탄생하게 되고, 그는 인간이 그랬듯 팬을 들어 종이 위로 또 다른 종이 인간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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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종이 인간은 닮은 듯 하면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모습으로 진화하는데, 자신의 몸에 직접 줄무늬를 그려 옷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수염과 눈썹을 그려 표정을 드러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얼굴을 사각으로 잘라 내기도 한다.

 

이야기의 끝 부분에는 두 종이 인간이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양상의 종이 인간들을 복제해 내고, 종래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공장식으로 종이 인간들이 생산되며 앞서 둘러본 첫번째 섹션인 ‘페이퍼 팩토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상케 한다.


이 공간에서 작가는 이렇듯 한정된 공간 안에 ‘뱀의 몸체’라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통해 우리 인간과 자연, 그리고 종이 인간들의 역사에 대해 재치 있게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단 한가지 흑색만을 이용하며 농도 조절을 통해 이토록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표현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금 장줄리앙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3rd section 페이퍼 시티(Paper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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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마지막 공간에서 장줄리앙은 쇼윈도를 깨고 나와 꿈꿔왔던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한 종이 인간들의 생활 양상을 그들의 도시를 전시장 안에 그대로 옮겨오며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도시 안에는 갤러리, 영화관, 꽃집, 카페를 비롯하여 다양한 공간들이 들어서 인간들의 도시에 뒤지지 않는 종이 인간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공간 하나하나에 녹아 들어간 장줄리앙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있는 표현 법에 이번에도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공간의 벽면 곳곳에는 장줄리앙 본인을 연상케 하는 누군가의 수배지가 붙어 있었으며 카페에 비치된 책을 펼쳐보면 아주 멋진 종이 노트북으로 변신을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심각한 표정의 지나가는 종이 행인으로부터 어딘가 익숙한 직장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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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Jullien


 

개인적으로는 공간을 둘러보는 내내 이 마지막 섹션이야말로 장줄리앙이 구축해온 작품 세계의 응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의 책상 위와 도시 구석에 세워진 탑 안에서 지난 DDP 전시 초입에서 보았던 그의 드로잉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가 하면 영화관에서는 그의 미디어 아트가 상영되고 있고, 갤러리 안에는 그의 회화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걸려 있었다. 관람자의 눈길을 대번에 끄는 파리에서 선보였던 쇼윈도 설치작품 또한 이 공간의 매력을 더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작고도 넓은 종이 인간의 도시를 걷고, 스스로 종이 인간이 되어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길거리를 거닐며 늘 관찰자의 입장에 있던 종이 인간들이 자신들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직접 꾸린 세계를 면밀하게 살펴 보는 기회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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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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