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경험, 그 이상의 -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글 입력 2024.10.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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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 포스터.jpg

 

 

지난 주 화요일, 간만에 올림픽공원역을 찾았다. 정확한 목적지는 올림픽공원, 그중에서도 KSPO DOME. 그러니까 일명 '체조경기장'이었다. 가끔 콘서트를 볼 일이 있으면 방문하는 곳이라 이곳에 대해선 원래 가지고 있는 인상이 있는데, 가령 귀가 터질 듯한 사운드나 관객들의 응원봉으로 가득 찬 모습, 그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 같은 것들이다. 체조경기장은 국내 공연장 중에서도 수용 인원이 많은 편이라, 보통은 팬덤층이 탄탄한 아티스트들이 이곳의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묵직한 상징성을 띤 공간이라, 언제 찾아도 마음이 두근거리는 곳이었다.

 

간만에 찾은 현장에서 처음 느낀 공기는 평소 체조를 찾았을 때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정확히는 첫인상이 그랬다. 전반적으로 차분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아티스트의 굿즈를 매단 사람들이 한 곳으로 우르르 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채색의 펑크룩 대신 포멀한 자켓을 입은 사람들에게서는 약간의 엄숙함까지 느껴졌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응원봉이 아닌 오페라 글라스.... 맞다. 나는 그날 오페라를 보기 위해 갔다. 플레이리스트에 '멜론 탑백'과 '숨듣명' 케이팝이 꽉꽉 들어찬 내가. 비교적 대중적인 장르인 뮤지컬은 종종 보는 편이지만, 사실 그 진입 장벽을 넘어본 것도 꽤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페라를 볼 결심을 했냐고 한다면, 글쎄. 이번 공연은 평소의 내가 어떤 종류의 음악에 익숙한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질 정도의 귀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공연도, 보기 싫다고 해서 일부러 선택지에서 미뤄둘 수 있는 사치가 허용되는 공연도 아니란 뜻이다.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 무려 100년만의 첫 내한. 몇 단어만 나열해보아도 얼떨떨해질 정도다. 푸치니, 투란도트, 네순 도르마.... 말 그대로 '전해만 듣던' 것들 아닌가. 그 공연을 현지도 아닌 한국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만 머리에 남아서, 홀린 듯이 관람을 마음 먹은 것이었다.

 

'오페라'라고 하는 단어가 주는 어떤 위압감을 내 마음속에 품고 출발해서일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비장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체조 하면 떠오르는 뜨거운 현장감보다는 긴장감이 앞서서 들어찼던 건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조금 굳은 몸과 마음으로 좌석을 찾아 앉았다. 힘이 들어간 어깨를 풀고, 자막이 나올 전광판과 무대를 번갈아보며 시야를 점검하면서도 약간의 긴장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가 있기도 했다. 어떤 무대를 앞에 두고 있든, 항상 느껴지는 설렘. 웅성거림 속에 섞여 있는 그 설렘 하나만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무대에서도 언뜻 보이는 웅장한 세트를 보고 속닥거렸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 무대가 나에게 전해줄 감동은 어떤 모양새일지 예측하고 즐거워하는 모습. 그 속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뜨거움이 왠지 반가워서, 힘껏 박수를 치며 막이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2012 Turandot atto III 01 08 dl foto Ennevi 771.jpg

 

 

그리고 순식간에 1막이 끝났다. 수백 명의 출연진, 그저 화려하다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도 없을 정도의 거대하고 정교한 무대 세트, 겹겹이 소리를 쌓아올리는 오케스트라, 가까이서 디테일을 뜯어만 봐도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의상들까지.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벌써 인터미션이야? 중얼거릴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극에 흠뻑 빠져 있었다. 왜 그렇게 비장한 태도였는지, 무색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심장을 울리도록 쿵쿵거리는 스피커가 아니라 오롯이 육성만으로 큰 공연장을 채우는 배우들에게서는 경이로움이 느껴졌고, 거대한 스케일은 CG 없이도 영화같은 웅장함을 자아내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흔히 극 장르의 특징을 시공간적, 물리적 제약으로 꼽는 반면 '투란도트'는 그런 제약을 엄청난 규모와 디테일들로 극복해버린 듯했다. 처음 막이 오르고 얼마간은 눈앞의 광경에 대한 현실감이 없어서 마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모리화를 차용한 익숙한 선율, 형형색색의 의상을 입은 핑팡퐁의 익살스러운 연기, 잠시 등장했을 뿐인데도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투란도트까지. 음악과 캐릭터들을 낱낱이 뜯어보는 재미도 톡톡했다.

 

20분간의 인터미션 이후 경쾌한 징 소리와 함께 2막이 시작되었고, 황금빛 조명을 받은 궁성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1막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모든 연출이 하이라이트를 향해갔다. 그 유명한 '네순 도르마'가 장내에 울려펴지자 모두가 숨죽여 집중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비중 있는 아리아가 극 후반부에 비교적 많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애절한 류와 차갑고 아름다운 투란도트 등 각 인물들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담아낸 선율이 체조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2012 Turandot_FotoEnnevi.jpg

 

 

공연은 화려한 연출이나 풍성한 사운드로 감각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동시에, 극적 재미까지 챙겼다. 사실 '투란도트'의 줄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한 편이 아니었다.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 기본적으로 서사 구조 자체가 명료하기 때문이다. 막 전환이 있기 전 전광판에 띄워지는 간단한 요약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느슨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대략적인 내용을 이미 알고 있기까지 했는데, 그런 흡입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잠깐 줄거리를 톺아본다.

 

 

고대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자신에게 청혼하러 온 모든 남자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놓는다. 문제를 맞추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예외 없이 참수형에 처해진다.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반한 각국의 왕자들이 수수께끼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고 만다. 한편 망국의 왕자 칼라프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중국 땅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와 그의 하인 류를 만난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어김없이 반해버린 칼라프는 공주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는다.


모두의 만류에도 끝내 나선 칼라프. 그는 모든 문제를 풀어냈지만 청혼에 응하지 않는 공주에게 동이 트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추면 순순히 목숨을 내놓겠다고 제안한다. 이후 칼라프가 시장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칼라프의 아버지와 류가 추궁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류는 모진 고문에도 과거 칼라프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웃음을 생각하며 그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그런 류의 헌신적 희생과 사랑에 감동한 공주는 끝내 청혼을 받아들인다.

 

 

널리 알려진 만큼 이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도 다양하다. 몇 가지 비판 중에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들도 있다. '이미지'로서의 중국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엿보이는 오리엔탈리즘 요소나, 공주를 어떤 '쟁취'나 '보상'처럼 여기는 위계적 시각 등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본 '투란도트'는 그저 완전무결한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오페라 '투란도트'에는 푸치니가 원작과 달리 새롭게 덧붙인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야기는 수수께끼를 맞힌 칼라프가 곧장 투란도트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이름 맞히기'와 '류의 자결'이라는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런 변주가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원래의 전개대로라면 이야기의 초점은 주로 칼라프를 향하게 된다. 수수께끼를 맞추면 아름다운 공주와의 결혼, 틀리면 죽음. 이 극적인 기로에서 당당히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쟁취해낸 명석하고 비범한 왕자. 어딘가 오래된 영웅담을 닮은 이 이야기는 고전적이긴 하지만 서사 그 자체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물론 '네순 도르마'는 불후의 명곡이지만!). 결국 영웅담은 주인공이 '보통'의 사람과 다른 인물이기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비범한 인물의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라고 하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주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두둑한 배짱, 그리고 그 배짱을 무모함 아닌 대담함으로 만들어 준 명석함에 대한 감탄? 혹은, 나라면 여지없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으리라는 약간의 공포감 정도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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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푸치니가 해석한 투란도트에서 궁극적으로 공주의 마음을 돌린 건 왕자의 명석함이나 영웅적 면모가 아닌,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며 누군가를 극진히 사랑한 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런 류의 헌신에 감응해 마음을 돌린 건 투란도트만이 아니었다. 그날 커튼콜에서는 유독 류 역을 맡은 배우에 대한 함성이 커서 살풋 웃음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류의 절절한 서사에, 그 가냘프고 애절한 아리아에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깊이 이입했던 것이다.

  

또한 이 내용대로라면 공주 투란도트에 대한 해석도 더욱 다채로워진다. 가령, 그녀는 정말 '쟁취'의 대상이기만 한가? 먼저 공주는 과거 자신의 선조가 전쟁 중 이방인들에게 당했던 모욕으로 인해 깊은 분노를 품고 있는 인물이다. 이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 분노가 아니다. 어떤 존재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 폭력 그 자체에 대한 분노, 한 나라의 공주로서 가지는 꼿꼿한 국가적 자존심, 자신의 외양만을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경멸. 투란도트에게는 그 모든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자신을 부상처럼 내걸고 많은 왕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투란도트가 결국 칼라프와 결혼하게 된 것은, 단순히 칼라프가 '승리'했기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성대한 결말 뒤에는 먼저 모든 고난을 이겨낼 만큼 순도 높은 사랑이 실존함을 보여준 류가 있었고, 또 그런 마음의 숭고함을 알아본 투란도트 그 자신의 내면적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에 엔딩 속의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승리'에 '굴복'하고 트로피처럼 스스로를 건넨 것이 아니다. 공주의 선택은, 더 이상 복수심을 내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의 극진한 마음 앞에 표하는 경의이기도 한 것이다.

 

 

 

경험, 그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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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런저런 걱정을 길게 늘어놓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긴 감상을 남기고 말았다. 다시 없을 귀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보러 간 공연이었는데, 단순히 '좋은 경험' 정도로 요약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공연을 깊이 즐기고 왔다는 뜻으로 읽혔으면 한다.

 

아주 드물게,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지 않나. 물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엔 경험 그 이상의 경험이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다는 감동을 뛰어넘는 극 자체의 감동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날 공연의 커튼콜은 여태 본 어느 공연의 커튼콜보다 길었지만 마지막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차례로 인사하는 배우들 한 명 한 명과 오케스트라를 향해 벅찬 마음을 가득 담아 계속해서 박수를 보냈다. 팔이 조금 아팠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값진 경험과 함께 경험 그 이상의 즐거움을 선물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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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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